이가영]]> <![CDATA[Gilstory - Challenge for the Unlimited Possibilities! > 이가영]]> 이가영]]> 이가영 http://gil-story.com 제공, All rights reserved.]]> Sat, 20 Apr 2024 16:28:20 Sat, 20 Apr 2024 16:28:20 <![CDATA[어떤 유고(遺稿)]]>
어떤 유고(遺稿)
글 : 이가영 (작가)
-Vilelm Hammershoi (5/15, 1864- 2/13, 1916)
1991년,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정말이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애매 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미완성 유고를 공개할 것인가, 아니면 문학의 역사에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보존할 것인가?
혹자는 위대한 작가의 글이라면, 가장 최악의 작품일지라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간 그의 작품을 읽으며 행복을 느끼며, 새 이야기를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도 알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 원고가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내밀한 일기도 아닌 그냥 이야기인데? 이는 엄연히 평생에 걸쳐 그가 사랑하며 남긴 작품이다. 어쩌면 공개하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 아닐까? 사실 그 자신도 마지막 원고를 없애고 싶었던 건 아닐지 모른다. 그럼 차라리 스스로 모두 찧어 버렸겠지. 아니지, 자기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스스로 없애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심신이 모두 지쳐버린 마당에 차마 그토록 완성하고 싶던 글을 조각낼 수는 없었으리라.
결국 작가의 아내는 그가 남긴 이 숙제를 쉽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남편은 죽어가면서도 거듭 미완성의 이 원고를 소각하라고 당부했지만, 마지막 순간 시시각각 닥쳐오는 죽음에 저항하면서 써 내려간 어엿한 작품을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비록 그 시작과 끝이 평소대로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은, 사방으로 조각난 메모에 불과했을지라도 도저히 태울 수 없었다. 이리하여 결국, 그 막중한 책임은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날 갑자기 세상의 온갖 딜레마를 욱여넣은 책임을 넘겨받는다. 대체 어찌 한단 말인가. 차라리 속 시원하게 공개해버릴까? 그럼 고인의 신성한 유언은 어찌되는 것인가? 죽은 자에게도 인권이란 게 있다. 아무래도 생전에 완벽주의 성향의 작가였던 아버지의 마지막 자존심을 손상 입혀서는 안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이는 결코 신사적인 행동이 아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런 양심의 문제로 원고 공개를 반대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 메모들을 손상시키는 일은 문학사적 손해로 여겼다. 차라리 만인에 공개해 그가 남긴 작품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를 바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미완성 원고는 그 어떤 작가의 초고보다 특별했다.
생전에 작가는 남들과는 좀 특이한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원고지가 아닌 인덱스카드에 초고를 작성했는데, 평소에 카드를 고무 밴드로 묶은 다음 들고 다니며 그 뭉치를 손안에서 굴리거나 카드 순서를 뒤바꾸는 ‘놀이’를 했다. 그 놀이가 곧 탈고의 과정이었던 것인데, 최종적으로 비서나 부인이 이 메모들을 타이핑했다. 마지막에는 이것들을 집 뒤뜰 소각장에서 직접 불태웠다. 그리고 그 자신은 결코 마지막 작품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총 138개의 인덱스카드. 8000개 단어, 그 최후의 작품.
‘The original of Laura’.
-그의 마지막 육필 원고, 인덱스카드.
이 메모들의 공개 여부를 고민하는 ‘드미트리 나보코프’의 이야기는 이후 ‘드미트리 신드롬’으로 회자되었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전문가들과 독자 대중의 안타까운 호기심을 부추겨 왔다. 이토록 요란했던 소동은 그 후 수십 년이 흘러서야 끝이 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의 환영이 나타나 그런 골칫거리는 이제 집어치우고 차라리 그 돈으로 인생을 즐기라는 경쾌한 조언을 해주셨다 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마침내 이 메모들의 출간이 결정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
- 4/22. 1899 ~ 7/2. 1977-
*이 어린이는 이 다음에 자라서, <롤리타>를 씁니다.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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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3 Apr 2017 18:33:52
<![CDATA[LEVELS OF LIFE]]>
LEVELS OF LIFE
글 : 이가영 (작가)
“하나의 죽음은 다른 죽음에 빛줄기조차 비추지 못한다.”
-E.M. Forster, Edward Morgan Forster (1879. 1.1~ 1970. 6. 7)
시간의 지층 그 사이사이,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산다. 다시 처음으로 시작한대도 차마 갚을 수 없는 영혼의 빚을. 아마 신의 축복을 몰아 받은 풍운아라 하면, 바로 그 빚이 최대한 많은 사람일 것이다.
물론 무거운 ‘빚’인 동시에 ‘찬란한 빛’인 그 모든 사랑은 제각각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너무나 다층적이고 섬세하게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그 구체적인 모양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그 모든 빛들 중에서 유독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서로 비슷한 이야기에 때론 시시하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거듭 매혹된다. 그리고 가끔 제법 신선하게 정말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는 그리스 신화에 풍기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가끔 그 진위 여부에 대해 캐고 싶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끼친 영향이 너무나 막대해서, 때론 부모가 죽이 잘 맞던 형제가 어린 시절부터 뭐든지 함께했던 친구가 준 것보다, 더 깊고 은밀하게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그야말로 유별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하게 수십 년을 마치 샴쌍둥이처럼 하나의 몸에 두 영혼이 살듯이 함께한다. 이렇게 말 그대로 반려가 있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신의 편애를 받아 기적을 선물 받은 운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연인들은 드물지만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며, 참으로 끈기 있고도 진실하지만 그래서 종국엔 방금이라도 부서질 듯 여리고도 순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꼭 애잔하면서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마지막은 지켜보기가 고통스럽다.
상실 그 후, 그저 추락하고 또 추락한다. 서로가 단단히 이어져있었던 것만큼 둘 중 하나가 그 짝을 잃어 가지고 있던 날개가 부서진다. 너무나 쉽게 또 처절하게 산산조각이 난다. 가끔 시간에 힘을 빌려 잊을만하다가도, 다시금 생생히 가진 것을 박탈당한 그 순간이 되살아나 숨을 내쉬는 일조차 버겁다.
물론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이 으레 그래왔듯이, 이런 역경을 잘 극복해서 그 삶이 끝까지 명랑하다면 좋겠다. 또 세상이 그걸 요구한다. 하지만 다시는 마냥 명랑해질 수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다. 이제 세상은 그 날개를 잃는 순간 변했고, 더는 되돌릴 수가 없다. 그것은 애초에 삶에 죽음이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명백히 짜인 각본이다. 그토록 찬란한 사랑을 겪었던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사랑으로도 그 빈자리를 메꾸기가, 다시 채워졌다고 착각하기조차 힘들다.
심지어 노년에 만난 아이, 언젠가 분명 알고 있던 어린 자식의 모습을 내려받은 손자를, 그 작은 천사가 찾아와 갖은 사랑스러움을 보여주고 안아줘도. 좋은 친구와 함께 맛이 일품인 음식을 먹어도, 함께 놀며 웃어도 가슴 한편에서는 통증 같은 피로가 몰려온다. 그렇게 어김없이, 틀림없이 일정한 리듬을 타듯이 끝없이 쏟아지는 서리들이 혈관 안에서 흩어져 신경 하나하나에 박혀 이곳저곳이 아리다.
막상 처음에는 길길이 날뛰며 화도 내본다. 결국 그 사람은 사라졌고, 세상은 그 후로도 아무 문제없이 잘도 돌아가는데, 왜 여전히 세상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보여야 하는지 불공평하게도 느껴진다. 그렇게 점점 더 깊이 침전한다. 그러다 인정하고야 만다. 더 이상은 그전에 맛보았던 기적은 없을 거란 걸. 이젠 더 이상 높은 곳에서 그토록 선명하고 분명하게 세상을 볼 수가 없는 걸, 그때는 함께였으니까. 당신과 함께해서 잠시 마법을 경험했을 뿐이니까.
과연 무뎌질 수나 있을까? 이 잔인한 결말 안에서 차마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경솔하고 옹졸하대도, 용서받지 못할 실수라 해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하 세계로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으러 내려간 오르페우스처럼. 그토록 그리웠던 사람을 뒤에 두고 앞서 걷던 그 남자처럼. 등 뒤에 들리는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게 될 것 같다. 그만 나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왜 이젠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지 불안해하면서. 여전히 당신, 내 등 뒤에 서 있는지.
대체 왜, 시간의 뿌리를 통째로 잃은 슬픔을 극복해야만 하는가? 끝내 훌훌 털어내고 강해져야만 하는가? 애초에 극복할 수도 없지만 이겨낼 생각도 없다. 그렇게 그 사람을 잃은 지 수년 뒤에야, 그제야 고백할 수 있었다. 스스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어떻게 삶은 그 전과같이 복원될 수 없는지를.
우리는 그런 거대한 상실을 온전히 이겨낼 만큼의 힘이 없다. 애초에 이는 인간의 의지와는 별개의 영역이다. 삶의 시작과 끝이 언제나 함께 존재했으되, 동시에 한 곳에 존재할 수는 없던 것처럼.
1979년. 줄리언 반스는 팻 카바노프와 결혼했고, 2008년 어떤 예고도 없이 그녀를 잃었다. 그 후로 5년 동안 이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껏 해왔던 대로 글을 쓴다. 그렇게 그 자신이 생생히 겪었던 이야기,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기적과 그 기적이 만들어낸 성취들은 고스란히 남았다.
하지만 그 상실의 고통을 영광의 상처라 부르기엔 그 흉터가 너무나 깊다. 독자는 그 고통의 맛과 온도를 그 글로나마 짐작할 뿐, 온전히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다만 그 부러움만은 생생히 남는다. 이 세상에 오직 둘만이 아는 내밀한 서사가 있던 삶은, 그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난 뒤에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 난다. 그래서 괜스레 이 모든 회환을 덮고 나서는 글쓴이를 걱정하게 된다. 그 하나의 세계를 잃고 난 사람은 과연 그 후로 온전히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작가는 거듭해서 머릿속을 떠돌던 자살에 대한 생각만은 단념했다고 고백한다. 이젠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은 자신마저 사라져버리면, 영영 이 세상에서 죽어버릴 테니까. 다만 그녀가 옆에서 항상 격려하고 사랑했던 새 책을 내는 일을 계속 해내가겠노라고…….
초반에는 ‘외톨이’로 전락했다며 혼자서 남은 시간들을 푸념했고, 또 자신은 무신론자이기에 내세에 다시 만날 상상도 할 수도 없다며 울적했지만, 결국 그는 이젠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가 함께 만들어준 자신의 모습을 지켜 냄으로서 그 존재 없이도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영원히 우리를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Julian Barnes | Julian Patrick Barnes (1946.1.19~)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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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2 Mar 2017 13:51:38
<![CDATA[시간의 뿌리]]>
시간의 뿌리
글 : 이가영 (작가)
‘The fox hunt’ 1893년. Winslow Homer(1836. 2.24~1910. 9. 29)’
“인생은 불균등하고 불규칙하며 형태가 여러 가지인 운동이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
무릇 신년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새로운 다짐과 따듯하면서도 든든한 오래된 격언들이 하늘 곳곳에 구름처럼 걸려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때를 잊지 않고 언제든 찾아오는 공기 같은 습관 또한 그대로 그 자리에 어김없이 느긋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삶에서 꽤나 자주 찰나의 결심이 존재하고, 다시 별일 없이 방금 전의 모든 다짐을 까먹게 만드는 어떤 운명적인 기질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꼭 뫼비우스의 띠를 온몸에 두른 듯이 습관이라는 자잘한 듯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운명을 안고 오늘도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물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섬광처럼 단번에 찾아와 단번에 스며들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이야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일이고 대부분은 나만의 변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 습관이 인생에 중대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령 지금까지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하다못해 가위가 어제 방금 썼던 포스트잇을 분명 봤는데 당장 없어서 허탈했던 그래서 다시는 정리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곳이 어디든 똑같이 반복하는 걸 다시 보고 있자면 이쯤에서 항복하고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다.
| 오늘도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어느새 다시 새해가 다가오고, 여전히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물건 없이 살고 싶기도 하지만 그거야 물건들의 잘못이 아니니,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불평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아주 잠시 잠깐 그들 스스로 움직이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차라리 그래서 지금까지 그토록 우산을 들고나갔다 매번 잃어버렸던 이유라면 위안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현실을 회피하는 자잘한 망상이 아닌가. 그저 그 스스로 원래 두던 자리에 놓기만 했으면 되는데, 왜 시시때때로 물건 배치를 바꾸냐는 말이다. 무엇보다 그걸 지금까지 십수 년 반복하고서도 마치 살갗에 들러붙은 피부나 지방처럼 그토록 고집스럽게 그 비루한 행동을 무슨 대단한 운동처럼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기이할 뿐이다.
| 현실을 회피하는 자잘한 망상
물론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정리를 못한다. 심지어 저장 강박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폐품이나 공병 심지어 택배 박스도 안 버리고 종국에는 쌓아두는 사람들도 있는데 차라리 자주 깜빡하는데 낮지 하면 조금은 덜 창피할까? 아니, 지금 다시 변명거리를 찾고 또다시 새해맞이 겸 스스로 정신 승리를 이룩하려는 게 아니라면 전혀 생산적인 생각은 아니다. 지금까지 잃어버리고 지워지고 다시 그걸 찾고 초초해 하느라 보낸 분초를 모두 합하면 이미 최소한 삼 년 이상은 썼을 테니,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 오늘부터 완전히 달라지기로 결심했어! 두 주먹을 불끈 쥐지만 또 완벽하게 잃어버렸다. 다시 그 서점에 가서 블루 벨벳 리본을 단 빨강 머리 소녀가 그려진 표지의 소설을 찾아야지 했는데 그새 까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쪽지는 어딜 찾아 봐도 없다. 대체 어느 책에 끼워 둔 것인가? 애초에 메모를 쓰지도 않았나? 이상한 영수증들도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하필 그 메모만 없나. 평생을 성실하게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한 몽테뉴가 주변에 이런 사람을 봤다면 분명 그 누구보다 신랄하게 나노 단위로 이 구제불능하게 딱한 이의 의식의 흐름을 분초로 쪼개서 보여줬을까? 그럼 조금이라도 뜨끔했으려나?
그러다 또 상상이 옆길로 세면, 만약을 생각해 본다. 정말 만약 그토록 순진한 듯 재미있는 사람의 친구로 살았다면, 몽테뉴의 꽉 찬 서재를 수시로 드나들며 책을 빌렸다 안 돌려줘 보면서 그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으면 재밌었겠다. 그때는 얼굴에 수염도 나고 키도 천장에 닿을 만큼 크고 다재다능해서 물론 기억력도 좋으며 운동도 잘 하고 또...
| 그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으면 재밌었겠다
아니, 그래도 그 몇 백 년 전에 살았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어쩌다 그가 아무리 고의가 아니라도 그렇게 책 주는 걸 까먹거나 아애 잃어버리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주면 스스로 너그러워서 이런 일쯤은 별일 아니야. 다들 그러고 살지 않냐고 그에게 되물었을 것 같다. 아니면 거기서 더 나가서 자네는 소심하게 오직 자신만 보는 글에 적어두는 추한 모습이 있지? 그걸 지금 다 빼놓고 내게 훈계하는 거냐고 따졌을지도. 그랬다가 우정의 완성 대신, 그 얄팍한 습관 탓에 조기에 관계가 끝이 났을 것도 같다.
아무리 인생이 그토록 불규칙하고 비이성적이며 비효율적인, 태반이 버리는 시간들로 채워져 찰나의 섬광 같은 순간들을 사랑해야 하는 기이한 곡예라지만, 이런 상태로도 도저히 줄 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할 것 같다. 이것은 그야말로 불규칙성을 넘어 뒤죽박죽 요절복통의 아수라장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또 며칠만 지나면 태연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ㅊ을 까먹는단 말인가? 이 정도면 그 오랜 시간 동안 퍽이나 정이 들어 증오하면서도 연민하여 그 곁을 떠날 수 없는 그런 전쟁 같은 사랑이다.
| 지극히 소모적인 습관에 시간을 도둑맞던 순간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마 다시 살아도, 그 어떤 습관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반복된 행동으로부터 스며든 기질 또한 그 전과 후로 같겠지. 대체 이런 걸 한결같다고 칭찬해 줄 수도 없는 일인데, 참으로 난감하다. 역시나 새해의 시작은 이런 당혹감에서부터 시작하는 건가? 당황하고 잠시 적응하다 다시 당황하고, 당황하고...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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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2 Jan 2017 14:54:26
<![CDATA[어머니의 이메일, 당신의 단어들]]>
어머니의 이메일, 당신의 단어들
글 : 이가영 (작가)
Hans Andersen Brendekilde(7 April 1857 ~ 30 March 1942)의 그림
“나의 어머니는 지금 사라지고 없는 시공간에서 온 사람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스칼렛 오하라의 그 유명한 대사 같기도 한 단어들. 하늘에 무지개가 뜨면 또 지는 법이라고, 그렇게 삶이 오고 가는 그 모습 자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묘사한 듯한 제목. 한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써 내려간 에세이, ‘The Rainbow Comes and Goes: A Mother and Son On Life, Love, and Loss’
어쩌면 복잡하지만 또 단순한 이야기들.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그 지나간 모든 과거를 터놓고 말해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던 어느 날 항상 건강하실 줄만 알았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그 후로 난생처음 어머니에게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형식적인 안부가 오갔지만, 곧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이 건너온 세월의 심연을 기꺼이 내보인다.
그가 서문에 언급했듯이 그녀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시공간에서 온 사람이다. 그녀 자신도 생각해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을 만큼 정말 한 세기 훌쩍 지나 버렸단다. 여전히 자신은 17살로 느껴지는 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좀 더 이 삶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절히 누군가에 빌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토록 시시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염원을 그토록 처절하게 원하게 되다니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고..
그만큼 그녀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정리해야 할 것들도 많다. 평생을 패션 사업가, 작가, 사회활동가 등으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나가며 살았으니까. 그렇게 매사에 열정적으로 삶을 환하게 불태우며 살았던 그녀는 결국 삶은 단 하나의 종착역으로 가는 단순한 이야기라 믿는다. 그러니 시간이 우리를 어디로 안내할지는 결코 복잡한 수수께끼가 아니라고.
그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본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 그 순간 그대로 멈춰서 그만 증발해버리는 이야기와 세포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철저히 없던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줄곧 수많은 예술 속에서 일상 안에서 끝없이 마주하며 살았다. 아니, 짐작하면서 살았다. 실제로 매일같이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이제 막 새로 시작하니까.
하지만 코앞에 떨어진 불을 끄듯이 진실로 자각하는 것과 막연히 저 멀리 있다고 예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한쪽 발을 깁스했을 때는 그토록 자유로운 두 발의 소중함을 뼈 속 깊이 느끼지만 회복하고 불과 며칠만 지나도 선잠을 자다 꾼 꿈처럼 아득해지지 않는가? 그래도 만약 그녀 정도의 연륜이 된다면, 그나마 그 오래된 미래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의 마지막을 이해한다는 건 흔히들 청춘이라 부르는, 모든 것이 처음으로 기억되던 시절이 과연 온전히 사랑스러웠는지 의심하는 것만큼이나 별 쓸모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삶은 사실 특별한 의미 없이 우연처럼 흘러가고, 다시 그때 그 처음처럼 별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마지막 앞에 서 있게 만든다.
그냥 그렇다. 그 시작과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나 이유가 없다.
그렇게 그녀의 시간도 바람이 옷깃을 스치듯이 흘러갔다. 그토록 자연스럽게 소리 소문도 없이 유일하게 사랑한 보호자였던 유모와 강제로 헤어지던 날 영원히 자신의 행복은 끝났다고 굳게 믿었던 열 살 남짓한 아이에서 어느덧 유모와 외할머니보다 더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겼던 시절, 더 이상 고모네 저택으로 걸려오던 할머니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던 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제는 유년 시절 유일하게 사랑했던 두 사람과 진작 헤어져 청춘을 가뿐히 넘어가고 그 이후로도 재빠르게 모든 시절을 넘어오며 노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뭐 이런 운 좋은 사람이 다 있나, 과연 이 사람처럼 운 좋게 몸에도 별 탈 없이 곱게 나이 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행운이 아닌가? 그러니 이제는 최후의 승리자처럼 반짝이는 왕관을 쓴 여왕의 회고록에 얼마나 깊은 이야기가 들려줄 수 있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귀한 가문의 영애로 공주처럼 산 그녀에 대한 질투도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물론 그 누구의 삶도 쉽지 않다는 건 머리로 잘 알지만, 그래도 각종 차별과 시대의 폭력 앞에 노출된 약자들에 비하면 유리온실 속에 보호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아픔들은 그 모든 비극들에 비하면 엄살 같기도 했다.
물론 그 넘겨짚기도 중반에 다다라서는 경솔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후광은 그만큼 강력했다. 어디든 자신만만하고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자리에 처음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 물론 그 유년 시절은 스스로 외톨이 같았고 주어온 아이 같아 힘들었다지만 그런 불안감도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단지 남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넘겨짚기에는 그녀에게도 삶은 그토록 끝가지 간질간질하게 온몸을 들었다 놨다 끝에 가서도 결판이 나지 않는 지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긴 시간을 완결해 나가는 이의 진실한 고백, 삶에 대한 생생한 사랑은 그래서 흠모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리아란 이름을 가진 소녀인 동시에 당대 록펠러 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밴더빌트 가문의 사람이었던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아이. 그 아이가 모든 홀로 겪어내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던 시간들을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어제의 세계다. 이제는 당사자도 짐작하기 어려운 먼 과거 속 세상은 그 어떤 틈도 내주지 않고 그녀에게서 스쳐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은 언제나 간담이 다 서늘해질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증발해 버린다. 그러니 한 세기 가까이 살아내는 일은,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견뎌내는 일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이다. 현실에서 삶이 시간 앞에 바스러져 재가 되는 일은 결코 노인과 병을 얻은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너무 많은 이들이 이미 다 늙기도 전에 죽은 채로 숨만 쉬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그녀가 지켜낸 진실한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이들이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사히 자신만의 삶을 완결해 내기를 응원하게 만든다.
그런 묘한 소망을 품게 하는 그녀의 말들, 당신의 언어.
비록 시작은 질투였지만 결국엔 흠모하게 되는 글로리아 밴더빌트 그녀의 매력, 당신의 단어들.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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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1 Dec 2016 19:37:39
<![CDATA[어떤 일기]]>
어떤 일기
글 : 이가영 (작가)
1936년 12월 28일 열두 살에 처음 시작한 이후로 소년은 생생하고 다부지던 몸이 점점 흐릿해지는 과정에 대해 평생을 썼다. 아무리 세상에 그 누구도 생각이 같지 않고, 저마다 다른 환상을 가지고 있다지만 이 남자는 좀 유별나다. 온 생애동안 자신의 몸, 그 피와 뼈 살로 이루어진 육체의 흐름을 생각의 궤적처럼 구구절절 적어놓았다니. 대체 누굴 보여주려고? 가장 사랑하는 딸 리종에게 남겼다는데 영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처음에는 무언가 괴상해서 특이해서 보다가 종국에는 훔쳐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 고백들.
하지만 또 막상 ‘몸의 일기’라는 해부학 교재인 듯 특이한 제목과는 달리 평범하고도 지루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동시에 생생하고도 우스운 이야기. 특별할 거라곤 없는 보통날들의 이야기. 자꾸만 날짜별로 훔치고 싶은 타인의 영혼.
하여간 그는 재밌는 사람이다.
아니 그런데, 그의 이름은 뭐였지? 중간에 나오긴 했나?
 
“66세 2개월 15일.
잘 잤다. 비 내리는 날엔 늘 그렇듯이.”
“44세 10개월 3일.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우리의 모습보다도 우리의 습성이 더 많은 추억을 남길 거라는 생각을 하면 흐뭇해진다.”
“23세 3개월 28일.
매번 감기를 앓고 나면 잠에서 깰 때 코가 막혀 있다. 바짝 마른 채로. 특히 왼쪽 콧구멍은 점막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있다. 검지를 콧구멍 깊이 넣어보면 손가라 끝에 쉽게 만져진다. 난 입을 벌린 채로 자고 목구멍이 마른 채로 잠에서 깬다. 바짝 마른 시체처럼.
“13세 1개월 10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정확히 묘사하기만 한다면, 내 일기는 내 정신과 내 몸 사이의 대사(大使) 역할을 할 것이다. 또 내 감각들의 통역관이 될 것이다.”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 (Daniel Pennac, ‘Diary Of A Body EXPORT’)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존재하는 그 영원한 과정에서 삶이란, 결국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답다. 시간의 장터에서 그 수많은 꽃 중에 어떤 빛깔의 꽃을 고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화환을 만드는 데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는가? 그저 평생에 걸쳐 어떤 꽃을 뽑아들 뿐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순간 평생 벗해온 그의 몸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잦아들던 순간에 확신했을 것이다. 결국에는 아름다웠다고, 아름다운 거라고...
아름다운 것은 단지, 추하거나 예쁘거나, 행복하거나 슬펐던 일이 아니니까.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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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1 Sep 2016 15:05:24
<![CDATA[두 소녀]]>
두 소녀
글 : 이가영 (작가)
* 오드리 헵번이 전쟁 중 그린 그림
어쩌면 일기는 불행한 사람들이나 쓰는 걸지도 몰라요.
지금이 힘든 사람들은 차마 털어놓지 못한 고민들을 종이에 쏟아붓게 되잖아요.그래서 나는 일기를 쓰지 않으려 했어요.
그런데 키티, 덜컥 당신을 선물로 받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네요.
물론 지금까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써볼게요.
이제 당신은 내 친구니까요.
오늘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키티에게. 당신의 친구 안네로부터.
the year of 1931,
Brunswick,
Amsterdam.
Anne Frank
1929.06.12.~1945.03.12.
나는 이제 기막히게도 이 삶이 불행하다 생각하게 된 나쁜 아이입니다.
그날 역에서 가축을 운반하는 열차에 유대인 가족과 노인, 아이들이 실려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시골로 가는 거라 했어요.
그 후로도 여러 번 시골로 가는 사람들을 보았죠.
화물 기차 위로 보이던 그 많은 얼굴들을 다 헤아릴 수도 없어요.
앙증맞은 작은 얼굴에 새까맣게 짙은 눈썹의 정성스레 땋은 머리, 자기에게는 너무 큰 코트를 억지로 걸친 아이를 나는 멀뚱히 보고만 있었죠.
난 어린아이를 지켜보는 어린아이였어요.
Audrey Kathleen Ruston
1929.05.04 – 1993. 01. 20.
키티.
이 작은 은신처에서 서로 보듬고 위로해줄 수 있는 존재는 서로일 뿐이면서도, 좀 자주 어머니는 얄밉고 아버지는 고집불통에 마고언니는 나를 화나게 만드는 법을 너무 잘 알아요.
그래도 당신만은 내게 다정하죠.
매일 이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꼭 여길 벗어날게요. 밖으로 나가면 당신에게 보여줄게요.
우리가 창문 틈으로만 엿보던 밤나무 밑동이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그 고목에 올라가서 본 풍경이 얼마나 근사할지를요.
우리의 밤나무는 확실히 지난해 보다 그 다음해 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있으니까요.
1944년, 5월 11일,
당신의 안네로부터.
* 암스트레담 안네의집 공식 홈피 당시 밤나무 사진.
“어머니는 한 번도 자신이 안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쌍둥이 같았어요. 심지어 어머니는 안네의 일기 1942년 8월15일 기록에서 삼촌 오토가 나치에 사살됐을 정황도 찾아내셨죠.
당시 안네의 은신처는 당시 어머니가 피난을 왔던 동네 근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알지 못했지만 같은 시기 나치 점령기의 네덜란드에 있었죠.”
-둘째 아들 루카 도티의 회고록 ‘집에서의 오드리’(Audry at Home).
안네와 오드리,
두 동갑내기.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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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 2 Aug 2016 19:18:27
<![CDATA[7월의 여행자 (2016-07-08)]]>
7월의 여행자
글 : 이가영 (작가)
아무리 인생은 길고도 짧은 여행이라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앞으로만 나아가던 활동적인 투어를 어느 순간 멈춰야 할 때라는 걸 시간에게 통보 받았을 때면, 일단 당황하게 된다. 더 이상 자신을 직업으로서 정의할 수 없는 시기가 왔다는 것에 서글픈 것처럼 아니면 더 이상 당신이 이 세대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헛헛함인가? 그런데 모든 면에서 평범했던 이 부부는 아무래도 특이하다. 어린아이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여행을 끝맺기를 고대해 왔다니. 그저 은퇴할 65세가 되기를 고대했다니! 두 사람이 조용히 함께 살 꿈의 집을 구하고, 차를 마시며 사는 풍경을 그때부터 상상해왔다고. 이 단순하면서도 명쾌해 보이기까지 한 삶이 또 있을까? 그리고 이제는 항상 두 사람은 함께 꿈꾸던 그림 같은 집을 구했다. 오직 두 사람만의 집.
이제는 이곳에서 남은 여생을 물 흐르는 대로 보내는 일만 남았는데...
그런데 이럴 수가, 어느 날 오후 4시.
비 오는 날인지 눈 오는 날이었는지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노부부의 일상은 지독한 악몽으로 변한다. 그 정체불명의 거구의 심술궂은 표정을 한 이웃집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들어와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몇 시간 이고 침묵을 하고 있다가 간다. 혹여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정말 계속 두드린다. 결국 교양 있고 점잖은 이 부부가 도저히 안 열어주고는 못 배긴다.
그 작은 사건 이후, 그가 알고 있다 믿었던 자신에 대한 모든 것들은, 인간에 대한 모든 것들은 모두 부서지고 만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무슨 일이냐고?
그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베르나르댕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느꼈어야 할 그런 일을
나는 아직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이 시작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자문해 본다.”
[Amelie Nothomb의 ‘les catilinaires’ - 오후 4시/열린책들]
아마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할 것이다.
정말 그런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이미 지나버린 어제의 세계로부터 온 그 모든 사건의 전말들을 헤아릴 수 있는가?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여행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먼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Rue de la Paix, Place Vendome in the Rain
splace vendome in the rain
[Edouard Leon Cortes]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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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6:51:16
<![CDATA[6월의 안과 밖 (2016-06-08)]]>
6월의 안과 밖
글 : 이가영 (작가)
"Vivian Dorothea Maier" (1926년 2월 1일 - 2009년 4월 21일)
릴리리랄라~
싱숭생숭 민숭민숭하다.
이즈음처럼 알 수 없는 계절이 또 있었나?
요새 해는 쓸데없이 일찍 출근해서 커튼을 안치고 잠들면 새벽 다섯 시 즈음부터 훤하다. 몸은 아직 잠들어있는데 괜히 눈만 껌뻑껌뻑, 괜히 지표면이 뜨거워지기 전에 혼자라도 나가서 신나게 뜀박질하고 와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 이때가 이렇게 특이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나 당황스럽다. 여름은 그냥 여름이지.
하지만 6, 7, 8월 다 같은 여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히 덥고 습해 짜증이 난다...로 기억되던 이 계절은 진작 버린 셈 쳤는데, 아무래도 억울하다. 거의 일 년의 절반이 여름인데! 이젠 어이가 없어서 안 되겠다. 더운가 보다 하면 다시 서늘하며 오락가락 저 혼자서 지그재그로 뜀박질하는 기온도 나름 멋이라 여기면서 그 맛을 찬찬히 음미해야지. 곧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냐 씩씩대겠지만 시작은 해봐야겠다.
하지만 결국 이 정신 나간 리듬을 어찌 이해하겠나? 꼭 그 무명 사진작가의 사진처럼.
그 내면의 이야기를 들여다볼수록 잘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더 알 수가 없게 되던 것처럼. 영화 각본으로 쓸래도 중간에 스스로 답답해서 이렇게 못 쓸 것 같은 이야기, 그 반짝이면서 쓸쓸하던 미행을 생각하게 된다.
작년, 이즈음 처음 알게 된 그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
2007년, 시카고.
어릴 젓부터 아버지 따라 골동품 수집이 취미였던 청년 존 말루프.
역사 책에 넣으려 옛 사진들을 찾아 다닌다.
그렇게 뻔질나가 경매 시장에서 낡은 사진들을 찾아 다니다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10만장 넘는 사진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무명작가, 저장 강박증을 앓고 있던 모양이다. 사진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각종 영수증과 잡동사니들을 덤으로 딸려온 걸 보면.
이토록 난감할 때가.
더 큰 문제는 인화하지도 않은 채로 박스 안에 칸칸이 쌓인 수 만개의 필름이었다. 대체 이걸 언제 다 인화해 본단 말인가, 그래도 이왕 가져왔으니까 꾸준히 꺼내보자는 무모한 다짐을 한다. 그래도 뭐 모두 50, 60년대 찍은 사진이라니까 저 중에 하나라도 건질게 있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엄청난 벼락을 맞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야말로 말로만 듣던, 알고 보니 우리 다락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을 발견 했어요 같은 전개인가? 이 평범한 청년은 전 세계 최초로 한 작가가 꼭꼭 숨겨 온 봉인된 시간을 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녀를 찾아보자고…….
알고 보니 그 이는 미국 전역에서 보모 일을 하던 유모였다. 사진은 취미였던 셈인데, 항상 산책 때마다 목에 롤리 플렉스 카메라를 메고서 뉴욕 거리를 활보했다. 처음에는 그 시간을 함께한 아이들이라면 그녀에 대해 말해 줄 것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기억하는 그녀는 여전히 비밀스러웠고 의문투성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법이 없었고, 첩보물의 주인공처럼 가명을 썼으며, 자신이 사는 집의 뒷마당에까지 신문을 쌓아놓으며 기사들을 모았다. 그래서 항상 같이는 가족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그런 일들로 일을 그만둔 적도 많았다.
그녀는 마치 미국의 그 유명한 동화 속 유모, 메리 포핀스처럼 평범하면서도 신비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아이들과 물놀이도 하며 정답게 놀았다. 어떤 때는 정말 천사 같아서 한없이 아이들을 사랑하며 농담도 곧잘 했다. 하지만 가끔 광적으로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떤 날은 5살짜리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목을 조른 적도 있었다. 친구도 잘 두지 않았고, 말은 오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매우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같다가도, 그 사진 속 편안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이토록 낯선 이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사람이 또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아무리 보아도 사진 속 얼굴들은 느닷없이 들이댔을 렌즈를 그 어떤 거리낌 없이 대려 편안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미 그녀가 만든 세계 안에 편안히 살아 숨 쉰다. 그렇게 우연히 길을 걷다 마주친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멈춰 서게 만들며 편안한 미소를 짓게 하던 사람.
이렇게 도통 알 수가 없는 사람,
" 아무도 몰랐던 당신에 대하여 "
조금만 더 자신을 날아가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그대에게,
그렇게 아무도 몰랐던 당신에 대하여…….
"Vivian Dorothea Maier" (1926년 2월 1일 - 2009년 4월 21일)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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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6:47:47
<![CDATA[5월의 인상 (2016-05-09)]]>
5월의 인상
글 : 이가영 (작가)
햇살은 따사롭고 온몸이 쑤신다.
이유 없이 그냥 졸릴 때.
아 벌써 오월이던가.
시간은 아무래도 축지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 같다.
입춘을 벚꽃을 휘날리며 팔 벌린 때가 정말 지난 주말서부터, 어쩌면 한 달 전쯤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시간과는 다르게 벌써 입하고, 해도 길어졌다. 겨울에 이어 봄으로 가는 갑작스러운 기온 차이에 몸은 적응하지 못했고 춘곤증과 매번 티격태격 데다가, 서로 지쳐 휴전을 합의한 게 얼마 전 일이다. 근데 또 협상해야 하나, 그처럼 심술궂고 변화무쌍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그 기분을 맞춰 줄 수가 없다. 방충망 바둑말처럼 붙은 벌레들은 덤이다. 대체 창문 어느 틈으로 들어오는 건지 작년에도 그 미스터리를 풀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출중한 그들이 온다니!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체념의 순간에, 어떤 사진작가가 그토록 사람들이 점프하는 모습을 찍는 게 흥미로웠다는 건지 이해가 간다. 급작스러운 계절의 습격에 이 어찌할 수 없이 시간이 주는 기묘한 박탈감과 긴장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러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하는 기묘한 질문까지 하게 되면, 본래 한 사람의 내면을 자기 자신조차 알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곱씹어본다. 사실 볼 수 없는지도 없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그렇대도 때로는 한 사람의 작은 행동들로 짐작은 해본다. 가령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무대로 존재하는 얼굴, 그 근육의 눈빛을 해석하고 배경음처럼 깔리는 목소리 같은 몸짓으로. 그리고 아주 자주 이런 표식들로 누군가의 내면을 알아낼 수 있다고 착각한다. 물론 좋은 단서들이지만, 결코 총체적일 리 없다. 대려 짙은 안개를 사방에 흩뿌려 그 실체를 더욱 알 수 없게 한다 할까?
그 모든 연속적인 모습들이 모여 만들어진 시간, 한 사람의 생은 곧 연극이며 이미 하나의 섬세한 이야기 그 자체다. 그럼 이런 계절을, 시간을 무대로 걸어둔 우리는 어떤 표정과 몸짓을 지어야 걸맞나? 사진작가들은 특히 인물 사진을 많이 찍는 이들은 바로 그 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어떤 무대에서 주인공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몸짓과 표정을 짓는지, 카메라를 돌아보던 그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들켰는지에 희열을 느낀다. 마치 비공식적인 심리학자처럼, 어느 순간에 셔터를 누를지 결정하는 것은 그 찰나에 그 사람의 가면 속에 읽히는 비밀이 무방비로 드러날 때. 필립 할스만은 그런 사진을 찍는 작가였고, 그 독특한 관점이 담긴 사진들은 우리가 이미 너무 유명해서 굳어져있던 유명 인사들의 이미지를 벗겨내고,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실재를 엿보게 해준다. 그는 그렇게 사진을 통해 우리가 너무 익숙해진 그 가면 안에 민얼굴을 포착해내는 일을 사랑했다.
엄밀히 그 어떤 예고도 동의도 없이 타인의 은밀한 내면을 캐내는 일이 비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의 사진들은 확실히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렇게 다양한 몸짓으로 순간의 날아오름으로 무중력 세상에서 하늘을 산책하듯, 마음을 열고 실컷 웃으며 즐거워지는 시간, 자신을 내보이던 천진한 순간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안 깊숙한 무언가를 주인공이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긴장하는 순간, 불쑥 온전한 타인이 그 염려스런 얼굴 앞에 렌즈를 갖다 댄다.
“마를린. 우리 그냥 뛰는 거 어때요?”
“네? 여기서요?”
“그렇게 고상히 앉아서 카메라만 노려보지 말고, 제자리에서 힘껏 뛰어보세요.
폴짝폴짝 토끼처럼!”
“내가 대상의 얼굴을 볼 때마다 숨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바로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 부분이 그 사람의 신비함을 더한다.
이러한 표정들을 포착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자 열정이 되었다.”
- 필립 할스만(Philippe Halsman / 1906.05.02~1979.06.25)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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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6:40:27
<![CDATA[‘4’월의 맛 (2016-04-11)]]>
‘4’월의 맛
글 : 이가영 (작가)
일본의 옛 시조에서는 ‘벚꽃’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왠지 4월은, 그런 잔인한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는 전국에 벚꽃이 만개할 텐데,
이 탐스러운 꽃 길을 걸을 수 있는 풍요를 선물 받고서도,
한편으로 스산해지는 이 묘한 계절.
그 달콤 쌉싸름한 4월의 맛.
클로드 모네의 연꽃.
빛을 인지할 수 없는 맹인이 되고서도 손끝 감각만으로 하늘의 구름처럼 뭉게뭉게 떠다니는 꽃을 연작으로 그렸던 빛의 화가. 그런데 유독 이런 작품들에 하이쿠를 갖다 두면 그럴싸하다. 간단하면서도 명징한 듯 투명한 느낌. 그런 입체적인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그림처럼 누구도 무엇도 아닌,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의 시.
아니, 아무리 시래도 너무 단숨에 끝나서 당혹감마저 안겨주는 말장난.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俳句)
그리고 여기, 익살스럽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픈 시를 짓는 사람이 있다.
그는 달팽이, 메뚜기, 파리, 벼룩 등 작은 미물에 대한 시를 썼다. 그렇게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난처하게 안타깝고도 가엾지만 동시에 어여쁜 삶에 대해 노래한다.
그것도 아주 간결하게, 단 한 줄로…
시인은 꼭 봄날에 오색찬란한 꽃을 보아도 그 순간이 지닌 어여쁨만을 보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은 아픈 동시에 찬란하고, 그리운 동시에 지겨운 것을, 그 일상 속 작은 속삭임을 포착해 남겨 두었다.
때론 사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행 속에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여유와 다정함을 박탈당한 채 살 수 있는데, 그는 평생토록 이 짧은 시들을 쓰면서 자신처럼 버림받고 추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 다정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깊고 자세히 보았다.
사랑스럽게도 보았다.
고바야시 잇사 (小林一茶, 1763년 6월 15일 ~1827년 1월 5일)
이 달콤 쌉싸름한 4월의 맛 같은, 한숨 같기도 한 고백들을 그리워해야지.
여름에 태어나 겨울에 간 이 소년을 생각해야지.
[참고 자료]
• 블로그 [문소영 기자의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의 클림트 그림과 잇사 하이쿠 구절
• 도서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류시화 저)"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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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6:36:38
<![CDATA[0, 1, 2, 3……‘3’ (2016-03-08)]]>
0, 1, 2, 3……‘3’
글 : 이가영 (작가)
3이란 아라비아 숫자. 오랫동안 쌓이고 굳어져 그 자체의 특징이 된 이야기들은 접어두고서라도, 내게는 이 숫자가 새 학기를 떠올리게 한다. 달력을 넘기면 새해와 함께, 잠시 한눈판 사이 시작되던 신학기. 새로운 종의 탄생처럼 새 교실, 새 반, 새 담임 쌤, 새로운 친구들을 마주했다. 모든지 익숙한 듯 하나 지형이 전혀 달랐던 그 어색하고,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던 시간.
매 해 그 첫날에는 너무나 짧은 틈 사이 안에 모든 것이 결정됐다. 휴식종이 땡 하고 치면 보통 서너 명이 모인 팀에 자신이 끼어 있지 못하고, 아직도 새 흐름에 적응 중이라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만 있다면, 특히 수줍음이 많은 아이라면 그 해 벗 농사는 반타작도 힘들었다. 그러면 어떤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 받으려 사는 게 아닐 텐데도, 점심시간에는 무슨 천고의 죄인처럼 온 몸을 어디 가눌 줄을 모르고 축 쳐져서, 끝없는 이야기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줄을 지나, 황량한 식판을 어기적 받아들고, 이 닭장에서 유일한 안식처라 공인된 시간을 묵묵히 버티는 일. 그러다 한 달간 그 모습이 계속 되기라도 한다면, 자연히 그 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만다.
사실 어떤 종류의 학생일지라도 그 잔인한 달에는 그 괴담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나만 가지고 있는 불안 증세인 줄 알았지만, 서너 번의 개학식을 경험한 뒤로는 그 공포가 나만의 광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그 한 달 내 세포가 분열하듯 여러 수다 팀이 해체되고 다시 모였다 재분열을 하는 과정에 스며든 공기에 짙게 배어 있던 그 진한 안도감 말이다. 그 깊은 한숨 같은 편안함. 한 공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가 맞장구칠 수 있는, 이 평범한 모습 안에 기꺼이 섞여서 참 다행이라고.
" 얄미운 변명 "
이렇게 이 숫자에는 설익은 시작과 태동의 이미지, 계절적으로도 겨울 내 웅크리고 있던 파릇한 생명들이 다시 움트는 순간의 향취를 느끼게 한다. 특히 거의 본능적으로 꽃을 떠올리게 만들며,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연금이라고까지 불리는 당장 꽃길로 나가 걸어 볼 것을 종용하는 가사가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니, 그래서? 이렇게 계속 ‘생각난다’고 계속 연상하다가는 광란의 마인드맵이 될 것 같지만 또 어쩌겠나? 애초에 숫자로 시작했으니 그 숫자의 이미지들을 풀 수밖에 없다.
사실 얄미운 변명이다. 기꺼이 독자가 되어주신 분들을 앞에 앉혀두고 의식의 흐름식으로 연상하기를 이어가는 게으름을 부렸다. 이 숫자를 통해 진짜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을 때까지, 순전히 우연에 기대 그나마 이야기로서 풀 수 있을 자신이 조금이라도 사랑한 주제를 찾을 때까지는. 그런데 사실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하다. 사랑했던 모든 주제들은 대부분 일상 속에 평범함을 가장한 채로 잘도 숨어 있어서 여간해서는 찾기 쉽지가 않다. 그저 끝말잇기를 영혼 없이 계속 읊거나, 프로이트 박사의 영혼께 그런 색다르게 심리학적으로 생각하기의 노하우를 배워오지 않는 이상 다 어디서 들어 본 말이고, 다 어디서 누군가에게 들었던 걸 잊고 따라하는 말인 것만 같다. 그러다 공포감까지 밀려오는데, 결국 내가 나여서 했던 말은 진실로 하나도 손톱만큼도 없다는 사실, 그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 그래서 말보다 더 정밀하고 간결하게 자신을 내보여야하는 쓰기란 행동은 공포와 상당한 압박감을 줄 수밖에 없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말하기도 그렇다. 자신에 대해 성의 없는 자기 소개서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말하기는 글쓰기와 똑같은 강도의 공포를 준다. 그런데 거기에 소리 내서 타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아니면 이미 오랜 시간동안 굳건한 고전의 지위로서 자신의 말을 관철하려는 대상과 텍스트에게 설익은 질문을 던진다는 건, 그것도 오직 자기 내면에서 구체적으로 끌어올린 좋은 물음을 가진다는 건 기존의 학제에서는 이루기 힘든 이상향이지 않나싶다. 국가는 마땅히 모든 아이들이 그런 교육을 받도록 노력해야 하거나, 최소한 시도조차 할 생각이라도 했어야 하지만 그 해 수능 문제가 잡음 없이 출제되도록 하는 것 외에는 그 오랜 세월 사유할 엄두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분한 생각이 든다. 그러다 결국 국가가 의무 교육으로 해준 게 무언데 혼자 발끈하며 삐죽였던 교복을 입고 있던 그 때. 그런 피해 의식 같은 것이 계절 탓으로 그 당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같은 강도로 부채질 해지던 춘분을 넘어선 어떤 날, 그 애니메이션이 재개봉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 영화가 개봉하던 시기 즈음부터 극장을 너무 자주 갔던 것 같다. 모아 둔 영화표에 찍힌 날짜를 기점 전후로 어렴풋이 그 시기 크고 작은 일화가 생각나는 걸 보면, 아마 그때 이후로 영화라는 장르에 영입된 것인데, 그런 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스크린으로 다시 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다시 마주한 그 잃어버린 것들의 나라…….
" 그 잃어버린 것들의 나라 "
낯선 곳으로 이사 가던 소녀, 품 안에 헤어진 친구들이 전학 기념으로 준 꽃과 선물 보따리를 무심하게 안고 뒷좌석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마치 이 고요한 시간은 앞으로 닥칠 요란한 모험을 경고하는 듯, 지나치게 평온하다. 그 맑은 수채화 톤의 장면들이 넘어 가면서 전개되는 환상과 꿈의 이미지들.
어느 순간 소녀는 낯선 요괴의 세계에서 길을 잃게 되고, 자신의 손이 어느 순간 해파리냉채 같이 투명해지는 걸 느낀다. 홀로 담벼락에 숨어서 투명해진 손끝을 비벼보며 울먹이던 때, 구원처럼 나타난 한 소년. 그는 난데없이 그 이마에 손을 얹고서 입 한번 뻥긋하지 않고 앞으로 소녀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해야 할 일을 보여 준다.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이 낯선 자를 믿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기에 덥석 그 손을 잡는다. 순간 정확하고도 빠르게 바람이 달려 나가 듯 이끌려 간 그 곳. 많은 요괴들을 단골로 가진 거대 여관.
잠시 인간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마법을 걸었는데, 저 다리를 넘어 뒤뜰로 가기 전까지 손님과 일꾼들이 눈치체지 못하게 한 숨도 내쉬어서는 안 된다. 드디어 그 입구로 들어서는 다리를 지나는 바로 그 순간, 있는 힘껏 소녀가 숨을 참는다. 마침 여관 직원인 개구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소년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문득 소름끼치게 멈춰 서더니, 이내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금세 코를 벌렁거리더니 얄밉게도 꽥꽥거린다.
“닝겐이다! 닝겐이야!”
그 촐싹이던 개구리 앞다리를 잡아다 먼 개울가에 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토록 간절히 그 순 무언가를 원했던 적이 있었나, 스스로 의아해 할 만큼, 넋을 놓고 있었다.
인간은 결코 출입할 수 없는 금단의 구역, 그들만의 세계에 침범한 소녀. 한 언덕을 넘으면 다시 다른 오르내림을 경험하게 하는 장면들 속에서 그 몇 주 전, 템플 스테이를 핑계로 집 주위에 원래는 있는지도 몰랐던 오랜 고찰에서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스님이 말씀마다 강조해마지 않으셨으나, 듣고 있던 당시에는 너무 진부한 이야기라고, 시큰둥해했던 단어 하나.
‘止觀(지관).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집중하는 일.’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다. 일생의 대부분 몸과 마음을 따로 분리된 채 부유하며 살기 쉬운데, 예술만은 흔들리는 시간에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지 않게 영혼을 붙잡아두는 마법을 부린다. 모든 종류의 예술에는 그런 미지의 세계에서부터 풍겨오는 향취가 있다.
그 향에는 서사가 있고,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좀 유별나게 특이한 느낌을 가진 개별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 평면으로 보이던 익숙한 대상이 언젠가 우연한 기회를 틈타서 지금까지 담아온 기억으로부터 무작위로 선별해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가진 질감은 평소 익숙한 분야를 통해 오던 감동의 결들과는 뭔가 다르다.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던 분야에서 온 것이라면, 더더욱 특별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스며있던 아름다움을 매번 피하고 보던 엉뚱한 곳에서 발견하다니! 그 기이한 공감의 순간이 오기 전, 상상할 수 있었던 그 어떤 진폭보다 넓고 깊은 아름다움을 본다. 마치 갑자기 내게 공감각 능력이 생겨, 세상의 온갖 빛과 소리, 공기 같은 무형의 것들에서조차 색을 보고 맛을 느끼고 생생히 시각화 시킬 수 있을 것처럼.
바로 그런 예술을, 이런 특별함을 ‘인터뷰’란 형식으로 경험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해봤다. 그저 엄청난 우연이, 심한 독서 편식을 비집고 들어와 어느 매체서도 흔하게 접하는 그저 그런 인터뷰란 편견을 엎고 그 책의 표지를 넘기까지 순전한 우연이 필요했다.
" 앎의 욕구는 삶에 대한 사랑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떤 권태로운 날, 가끔 그 내용은 보지도 않고 제목이나 표지로 구매를 결정하는 커버 도벽 탓에 몇 달 전 사둔 신간을 발견했다. 얼마나 무신경했으면 이제 곧 버릴 폐지처럼 종이의 천적인 물기 어린 베란다에 버려두었을까. 처음엔 그런 미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다 첫 장에서부터 사람을 사로잡는 섬세함, 옮긴이와 저자의 사려 깊은 서문에 헤어 나올 수 없다가, 쉼 없이 오고가는 대화들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오고가는 대화가 질문과 차분한 대답들이 그토록 재미난 것이었다니. 그리고 그 첫 챕터를 장식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학 전문 칼럼니스트 슈테판 클라인과, 화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호프만 박사.
저자가 물었다.
그럼, 정말 분자가 예술과 똑같은 형식으로 아름다울까요?
물론, 감성과 지성 사이 비중이 다르긴 하겠죠. 하지만 서로 상호 보완적 관계라 할까요?
아름답다는 건 결국 지성과 대상 사이에서 오는 긴장감이에요. 물론, 최초의 촉발은 늘 감각적 끌림에서 오겠지만.
결국 제가 예술에서도 과학에서도 발견한 건. 양쪽 다 인류의 정신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용기를 준다는 거예요. 그 풍요로움에 대한 생각을 그래서 가능한 자주 접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들을 쫒아 다닙니다. 동시에 삶에 대한 신뢰를 굳게 붙들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죠. 그래서 저는 온갖 지역, 시리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에서 온 풋내기 화학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하루 9시간씩 화학결합을 알아내려 고군분투한 뒤에 다 같이 차려 먹는 저녁은 정말 굉장하죠. 사실 분자는 이 시간들을 위한 핑계에요.
그리고 그와 헤어질 때즈음 저자가 가장 궁금했던 질문 하나.
오랜 세월, 자신이 맞는 지도 알 수 없는 그 지난한 실험들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그 끈기의 근원에 대해서…….
앎의 욕구는 자연에 대한 사랑, 따라서 삶에 대한 사랑의 한 형태에요. 사람은 앎에서 싹트며, 앎이 확실해질수록 그 사랑은 더욱 깊어지죠. 그러니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정확히 관찰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하죠.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분야에 대해 이토록 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일이다. 호프만 박사 외에도 자신의 영역에서 큰 족적을 남긴 열 세 명의 과학자들의 인터뷰는 하나같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그들 중에 처음부터 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드물다. 다들 우연의 지도에 이끌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바꿨다. 심지어 소설을 쓰기 위해 원주민의 생활을 조사하다 인류학자가 된 세라 허디 박사와 자신의 말대로 행복한 의사였다가 학회에서 본,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 그림을 보고 신경학자가 된 한나 모니어 박사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전공인 분자 생명학이 아닌, 프루스트의 소설 속 ‘질투’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미 인터뷰에 가감 없이 드러나는 그네들의 삶 속 선택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박진감 넘친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선택의 다리들을 되짚어 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강렬한 통증 같은 감각을 준다. 그러니 우연이 더 현실적일 수 있는 삶에서, 인생을 계획할 수 있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희망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멋진 게 아닐까?
그렇게 순전히 우연으로 생명을 허용한 우주에 대해, 그 세계의 시작과 끝 앞에서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그토록 아득한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시간과 기억의 별,
그 너머로 흩어진 먼지 같은 걸…….
# 3월 추천 영화_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The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 2001)"
#3월 추천 도서_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슈테판 클라인)"
#3월 추천 다큐_ EBS EDIF 국제 다큐 영화제 선정작 ‘홀로코스트의 아이들 (children of the holocaust, 2014)"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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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 30 Jul 2016 17:3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