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CDATA[Gilstory - Challenge for the Unlimited Possibilities! > 김은정]]> 김은정]]> 김은정 https://gil-story.com 제공, All rights reserved.]]> Tue, 10 Dec 2024 11:06:00 Tue, 10 Dec 2024 11:06:00 <![CDATA[만남 (2014-10-08)]]>
만남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중국 선전에 살던 때였다. 선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알게 된 독일인 친구네로 차 마시러 놀러 갔던 어느 날 오후, 대뜸 그 친구가 하는 얘기인 즉, 자신은 새로운 터전에서 정 붙일 친구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며 새로운 만남은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해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극심한 만남과 이별의 반복은 “마음을 왜 주었을까?” 하는 후회를 가져다 줄 뿐이다 라며 또 다른 인연을 맺기 위해 본인은 힘쓰지 않을 것이라며 유의하라고, 친구로서 조언하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 그녀의 발언은 충격이었다. 물론 영양가 있는 사람만 선별해서 만나라는 취지는 알겠으나 만남을 갖는 행위 자체를 깔아뭉개는 식의 사고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처럼, 그런 사람들이 있다. 곁에 마음이 맞는 몇몇만 두고 ‘나머지’는 배불러 못 먹는 음식인 양 쳐다보지도 않는 식을 존중하는 스타일. 그도 그럴 것이 이팔청춘에서 한참 멀어진 삶의 길목에서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지사 일 터. 그럼에도 나는 전에 없던 만남을 좋아한다.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인적’ 영감을 받는 기회인 것 또한 사실이라 피곤함을 무릅쓴 채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을 저버릴 수 없다.
혹자는 힘들지 않냐고, 왜 그토록 심신을 피로하게 달구는지, 제발 쉬라고 조언한다. 나, 인간중독인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힘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말하는 것, 경청하는 것 모두 신경을 운동하도록 부추기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만남을 향해 기꺼이 다가가는 것은 좋은 기운을 나눠 갖고 싶어서다. 좋은 기운이 많다고 해가 될 것은 없다.
살다 보면 막역한 친구라고 믿었던 이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단절되는 경우가 생긴다. 우정의 숲이 시커매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빛은 다시 들어온다. 그늘은 새로운 인연을 통해 양달로 바뀐다. 긁힌 자국은 그렇게 아물어가는 가운데 삶은 계속된다.
나는 만남이라는 단어를 사랑한다. 피로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예기치 않은 보람이 건네는 기쁨의 무게를 난 필요로 한다. 때로는 시간 손실이 발생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성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접하면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 마음 속 정원을 거니는 이들이 소중하다고 되뇌면서.
“설마 너, 친구되기 싫다고 사람을 안 만나고 살겠다는 뜻은 아니지?”
싱가포르에서 사귄 한 스위스 친구가 있다. 그 친구도 싱가포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우리는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집을 꾸미는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 등을 어디에서 사냐고 물어보길래 중국에서 장만한 것들이 많아 가능한 한 꾸미지 않고 살겠다고 답하자 물어온 그녀의 질문이다. 체류 기간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 (어차피 떠날 운명이라) 사람들을 굳이 사귀지 않는 부류를 익히 봐왔다고. 그녀는 단호했다. 사람은 불리고 싶지 않은 살림살이가 아니라고. 사람 만나는 일에 인색하지 말자는 데 동의하며 우리는 맞장구를 쳤다.
힘이 되어줄 만남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만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놓치는 격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또한 예정에 없이 만나게 된다. 번지는 만남 속에서 꽃피는 관계는 믿거나 말거나 피부에 혈색을 돌게 한다. 지난 해 여름 서울에 들어갔을 때 두 달 간 만난 사람 수는 1백 40여 명. 그리하여 결심했던 것이 이 해 여름 서울에 들리면 만남을 대폭 줄이겠다는 다짐이었건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위가 아파 이틀 간의 약속들을 취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만남을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근황에 대한 얘기가 앵무새의 수다 같은 모양새를 띠어도 만남을 누릴 수 있다는 고마운 사실에 지친 입은 피로함을 잊는다.
만남이라는 단어는 목걸이를 연상시킨다. 한 알 한 알이 엮여 차림을 빛내주듯 사람 하나하나가 모여 삶을 비옥하게 다져주니 말이다. 고락간에 만남으로 점철된 인생이 좋다. 만남은 기를 뺏기도 하고 주기도 하나 싫든 좋든 에너지 단지임엔 틀림 없다.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기에 솔로 모드로 조준한 상태에서는 힘들다. 다양한 에너지로 충전된 숨을 내쉬어야만 편하다. 그리고 하나 더, 만남에 의미를 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으니 나 자신을 더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몰랐던 내가 있다는 사실, 만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e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홍콩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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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3:38:09
<![CDATA[길 (2014-08-08)]]>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처음부터 쉬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쉬운 길로 가려고 했으나 생각지도 못하게 어려운 길을 걷게 된 사람이 있는 반면, 어려운 길을 택했건만 쉬운 길을 가게 되는 운 좋은 사람이 있다. 또한 이 길도 저 길도 고르지 못해 아무 곳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걸어가는 길이 다르고 설령 같은 길을 걷더라도 ‘어떻게’ 걸어가는가에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에도 차이가 생기고 목적지 자체가 틀려지게 됨에 따라 천차만별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각기 다른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꾸려지면서 수십 억 가지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는 부류인가?
나는 미련하게도 길을 돌아가는 스타일이다. 지름길로 가면 왠지 반칙을 범하는 느낌이 든다. 꼬부랑길을 물론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해결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땀을 꽤 흘렸으며 시간을 잡아먹었다는 사실에 아둔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 그럼에도 때로는 그런 아둔함이 마냥 밉지만은 않은 것이 돌면서 갔기에 ‘구경’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자긍심이 자책감을 보듬는다.
시간을 벌고자 날짜 별 계획을 세워 실행하면 가는 길이 조금 덜 버겁다. ‘지나면’ 될 것이라는 되새김질은 전진을 위한 양분이다. 지나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대가 형성되면 관계라는 것이 짜이면서 삶은 분주한 빛깔로 칠해진다.
영국의 여행작가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은 ‘인간의 진정한 거처는 집이 아닌 길’ 이라며 인생 자체가 걸어서 가는 여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떠올린다. 울퉁불퉁한 자갈들이 발에 걸리는가 하면 보드라운 잔디가 밟히기도 하고 모래사장도 나오고 물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나 자신을 보게 되면서 산마루를 넘을 용기가 생긴다.
길은 그렇게 내 마음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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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3:20:33
<![CDATA[여행 (2014-07-08)]]>
여행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이 두 글자를 떠올리기만 하면 심장이 뛴다. 두 글자는 “그럴 수도 있구나”라는 사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새로운 취향을 취하도록 하고, 집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부유한 피로감을 선물하는 두 글자는 바로 여행이다. 여행이라는 글 주제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때껏 걸어온 길이 여행으로 점철되었던 것 같다.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기를 반복하고 있는 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트남
일곱 살 때 처음으로 나라 바깥 땅을 디딘 곳은 월남으로 알려진 베트남이었다. 체크 무늬 치마에 하얀 재킷, 베레모까지 세트로 맞춰서 김포공항으로 향했던 기억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생생하다. 70년대 사이공. 한글 쓰기 연습을 철저히 시켰던 엄마, 녹두와 코코넛 밀크가 들어간 빨강 하양 초록 세 가지 색을 띤 달콤한 음료, 운전수 아저씨가 즐겨 먹던 버터와 설탕을 바른 쫀득하고 고소한 빵(그것이 프랑스인들이 매일같이 먹는 바게트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파임이 유난히 깊은 연분홍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었던 피아노 선생님, 세모꼴 모자를 쓰고 몸에 꽉 붙는 아오자이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여자들, 여름만 인식하는 무더운 날씨, 드넓은 초록 잔디를 보유했던 한국대사관에서 열리던 가족 모임, 울창한 고무나무 숲, 국제학교에서 익혀나갔던 영어라는 이름의 외국어, 혀를 기분 좋게 싸고 도는 망고와 파파야, 리치의 향긋하면서도 단 맛, 고개를 들면 허공을 가르는 종려나무의 뾰족한 잎들,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는 사탕수수, 수십 색의 구슬들이 박힌 벨벳 슬리퍼.
베트남은 내게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에 익숙해지고 거멓게 그을린 피부에 애착을 갖도록 힘을 아끼지 않은 일등공신이다. 왜 그렇게 햇빛을 좋아하냐고 묻는 질문에 제일 먼저 튀어 나오는 단어는 “월남”이다. 살갗에 티를 내며 내려앉는 햇빛의 강렬한 기운을 느끼면 버겁게 품고 있던 걱정이 사라지는 행복감에 젖는다. 잠깐이지만 마음을 고쳐 잡는 데 말 잘 듣는 신비한 묘약이다.
스위스
열세 살에 만난 유럽은 서양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난생 처음 가보는 스위스의 제네바. 그곳은 초콜릿과 치즈, 시계, 스키장, 손수건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시장을 보러 슈퍼마켓에 엄마를 따라 처음 갔던 날 생애 그토록 풍부한 유제품과 햄을 본 적이 없었다. 마요네즈와 새우를 얹은 카나페, 초콜릿과 생크림, 체리의 맛이 환상적인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 스키장에서 먹으면 더욱 감칠맛 나는 치즈 퐁듀와 라클레트(뜨겁게 달군 치즈를 먹고 나서 절대로 물을 마시지 말라는 친구 엄마의 조언은 철칙이다.) 등 난생 처음 마주하는 유럽식은 먹성 좋은 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식사 때마다 포도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 식사를 하고 나면 디저트로 마무리하는 식습관, 아침에 먹는 건강식 뮤슬리, 하드롤에 발라 먹는 초콜릿 잼 뉴텔라, 야외에서 구워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인 짭짤한 메르게즈 소시지. 낯설던 스위스는 그렇게 풍요로운 먹거리로 어색했던 공기에 정을 주게 만들었다.
생애 두 번째 여행지 스위스에서 건져 올린 보물은 그 무엇보다 불어였고 문화와 관습이 다른 서양 친구들과 나눈 우정, 그리고 가족 모두가 함께한 시간이었다. ‘쁘’, ‘뜨’, ‘끄’ 일색인 불어로 듣고 말하고 쓰는 능력을 어디에서 또 배울 수 있다는 말인가. 스위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인 친구들과의 우정이 생기지 않았으면 ‘백인’은 어쩌면 먼 존재로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시류를 공유한 연대감, 엄마, 아버지, 동생들 모두와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동양과 서양의 정서를 잡음 없이 오갈 수 있는 것, 그 용이함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여유 한 줌을 마련해주었다. 누군가 스위스에서 왔다고 하면 반가움이 앞서는 이유다.
프랑스
대학 졸업 직후 패션 공부를 하기 위해 날아간 파리.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교감을 이루는 파리에서 가져온 것은 일리가 있으면서도 독특함을 내포한 감성이다. 고색창연한 건물이 내뿜는 고매한 베이지 컬렉션, 루프 탑 위로 펼쳐지는 푸른 하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스타일리시한 패션 감각을 소유한 파리지엔들, 저녁 식사 전 아페리티프(식전주) 한잔을 거치는 여유, 끊임 없이 이어지는 예술 전시, 멋의 유혹, 교외 친구네 부모님 댁에서 보내는 한갓진 주말, 길가에서 사먹는 두툼한 버터 설탕 크레이프(옛날 사이공에서 먹던 운전수 아저씨의 바게트 맛과 비슷하다), 싱싱한 굴에 착 달라붙는 서늘한 화이트 와인, 길거리를 누비는 즐거움, 이른 아침 문 여는 카페의 테라스에서 만끽하는 에스프레소와 버터 맛이 잔뜩 나는 크로아상, 크리스마스를 앞둔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의 진열장, 샴페인을 곁들인 축하 모임, 갖춰서 입는 속옷의 중요성, 자연스러움의 미덕, 오리엔탈 스타일의 재발견, 다분한 호기심, 18구 생 피에르 원단 시장 지역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들이 보여주는 색상 감각, 마레 지역의 유태인 빵집, 엘레베이터가 없는 구식 아파트, 어디서든 책을 꺼내 읽는 국민 정서,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에게 채소 먹기를 강요하는 엄마들, 허튼 음료수 대신 소지하고 다니는 물 한 병. 로망을 투영하는 가로등 불빛,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잿빛 비둘기, 음산한 가을 공기, 저녁 식사 옷차림에 신경 쓰는 몰입도… 파리의 단상들은 형용할 수 없는 감(感)으로 신경 세포를 적셔 놓는다.
파리의 공기는 여자를 더 여자답게 탈바꿈시키는 마력을 갖는다. 리차드 와그너, 에밀 졸라, 위젠 드라크르와, 프랑스와 트뤼포, 샤넬 등 파리의 예술적 취향이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불러모은 점을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파리는 창의적인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영감의 보물 창고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중국
남편과 아들,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생활하게 된 외국은 중국이었다.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중국은 내 심장에 들어 있지 않았다. 호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중국을 갔다 온 사람들로부터 숱하게 들은 여행담의 골자는 비위생적인 환경이었으니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선뜻 좋은 감정이 생길 리 만무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은 다르다. 중국이 거론되면 일단 반갑고 정겹다. 살아 보지 않으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임을 터득하도록 안내해준 길잡이는 4년간의 남부도시 선전에서의 나날들이었다. 식당에서 식은 밥을 내올 수 있고 문제가 있어도 괜찮다고 (이해가 안 되는) 웃음으로 일축할 수 있고 더운 날씨를 못 이겨 러닝 셔츠를 걷어 올리고 다닐 수 있고 병원에 놓인 메모지 한 무더기를 내 것인 양 가져 올 수 있고 계약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고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음에도 차들이 정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가슴을 혼자 팍팍 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 중국에 산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반전이 일어났다. 효능이 제 각각인 차들이 몸을 더 편하게 해준다는 사실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산해진미에, 그곳에서 짜인 새로운 인간 관계에, 서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화의 깊이에 동화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 13억 인구가 숨 쉬는 땅이 매력 있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 통성명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둥지라고 말하면 눈들이 커지면서 우려와 호기심, 선망이 뒤섞인 반응이 읽혀지곤 했다. 성장을 멈추지 않는 중국 시장의 위력은 세계의 기업들에게 절체절명의 기회를 안겨주고 있기에 새로운 포부를 품고 중국 땅을 밟는 외국인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중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다. 비약하는 중국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증언할 수 있음이 얼마나 역사적인가.
세련되게 다듬은 유행이 발 빠르게 전해지지 않아도 하루하루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낯선 땅에서 알게 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었다. 보통이 아닌 국가에서 사는 외국인들은 좀 더 잘 뭉치는 경향이 있다. 예사롭지 않음을 공유하면서 각별한 친구가 되어버린다. 중국 안에서 세계를 체험하는 신기로움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세계’를 지각하는 행복을 맛보았다.
싱가포르
싱가포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서비스가 최고라고 소문난 싱가포르 항공과 맛 있다는 음식,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깨끗한 도시 환경이 고작이었다. 마흔 줄 중반이 된 길목에서 만난 싱가포르는 싱그러운 거주지로 어렸을 적 베트남을 상기시키는 요소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이 몇 초, 때로는 몇 분, 과거로의 아득한 시간으로 데려가곤 했다. 겨울과 무관한 열대성 기후만으로도 사랑하기에 충분했다.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민성은 서로 다른 종교에 따른 사회 관습을 유지하는 이채로운 조화를 보여주고 있어 그 절묘한 균형 체계는 새로운 둥지로 3년 간 자리매김할 이국 땅에 가까이 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매일 아침 눈뜨면 동공에 맺히는 열대 나무들과 샛노란 햇빛은 다음 행선지인 홍콩에 가면 보지 못할 장면이다. ‘정원 속의 도시(a city in a garden)’. 도시 곳곳을 누비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캐치프레이는 캠페인 구호에 머물지 않고 실행력이 뛰어나 자연과 도시의 틈을 보기 좋게 메운다. 시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아름다운 공원들, 지역별로 특색 있게 존재하는 호커 푸드 센터(노천식당), 큰 소리 치지 않는 사람들, 비라는 것이 도대체 언제 왔었냐는 듯 거짓말처럼 쾌청한 날씨, 기다림을 요구하지 않는 공항의 출입국 심사대,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게끔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주요 쇼핑센터까지 설치한 캐노피, 매콤한 페퍼 크랩. 이렇게 나의 싱가포르는 백지에 기록되고 있다.
다음 행선지는 홍콩이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하나 깊이 생각하지 않을 요량이다. 낯선 곳은 언젠가 익숙한 곳으로 변할 것이다. 떠나고 살고 사랑하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삶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는 이야기 책을 닮아가고 있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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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3:07:08
<![CDATA[엄마 (2014-06-09)]]>
엄마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크림색 꽃 브로치는 브로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동유럽에서 건너온 예스러운 그 브로치만 차면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야기하는 물건들의 출처는 영감의 보고 ‘엄마’다. 엄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막힌 손맛이 배인 도시락도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도 아니다. 내게 ‘엄마표’ 물건은 브로치다. 브로치는 중년 여성들의 멋 내고 싶은 마음을 달래주는 장신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겼다. 엄마로부터 자개로 만든 ‘동백꽃’ 브로치를 받기 전까지는. 오랜 시간을 장롱 속 서랍에서 지내온 꽃 모양의 자개 조각은 심히 곱다. 태생적으로 갖춘 아름다운 외양에 치장하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딸에게 남겨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보태져 그 멋과 맛은 심장을 기분 좋게 콕콕 건드린다. 어디에나 착착 감기며 옷을 돋보여준다.
언젠가 엄마를 기억에서 만나고 싶을 날이 도래하면 가슴 한 켠에서 만개한 자개 꽃 한 송이는 가장 아름다운 위안을 선물할 것이다. 엄마는 믿어도 좋은 감각을 부르는 최고의 멋쟁이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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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2:57:27
<![CDATA[친구 (2014-04-08)]]>
친구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친구가 몇 명이냐고 물으면 물방울처럼 똑 떨어지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속마음의 바닥까지 내보이는 절친한 대상만을 친구로 정의하기에는 그 외, 다시 말해 속내까지 드러내 보이지 않는 지인들과 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뿐 나름의 친함은 존재한다. 개개인이 다르듯이 인간 관계도 각양각색이다.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진하게 친하든 미약하게 친하든 약속해서 만나는 정도라면 ‘어느 정도 친함’이라고 규정한다. 관건은 ‘어느 정도’가 움켜 잡고 있다. 내 삶 안에 자리잡은 친구라는 단어를 해부해본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친구
아무에게 쏟아낼 수 없는 종류의 얘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다. 소위 비밀로 명명되는 얘기를 털어 놓을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그 관계는 한우의 귀함에 버금간다. 이들 친구는 가족 다음으로 떠올려지는가 하면 심장 안에 VIP 좌석을 늘 차지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 편이다. 사족을 달지 않아도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친구 중의 친구라고 보면 된다. 아침 점심 저녁 어느 때 봐도 상관이 없다. 언제 보는 것보다 만남 그 자체가 중요하다. 만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친구
느긋해지기 힘든 점심 식사보다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깃든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친구를 향한 마음이다. 저녁은 왠지 모르게 아늑한 품을 선물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친구’와 다른 점은 속내를 알리고 싶지 않은 대상일 뿐 하루의 시간대 중 황금에 비유되는 저녁 때 보는 만큼 좋은 감정을 풍부히 갖고 대하는 친구.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친구
자주 만나지 못하는 관계라도 꼭 봐야 할 얼굴이 있다. 봐야 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서일 수도, 직업적인 연관성 때문일 수도,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저녁까지 못 가더라도 점심 한 끼 먹으며 일상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친구(물론 앞서 언급한 두 카테고리에 속하는 친구를 저녁 시간에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점심 때 볼 수도 있다). 향후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차 한 잔을 나누는 친구
일반적으로 티 타임에 약속을 하는 경우 친한 사이라고 못박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허나 차 한 잔이라고 과소 평가 하면 곤란한 것 또한 사실이다. 차 한 잔에는 ‘겨를이 없어 못 만났기에 얼굴만이라도 보지 않으면 후회에 젖을’ 애잔한 감정이 실려 있다. 원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이라고 해도 지켜나가고 싶은 ‘접점’이 보이면 차 한 잔은 훈훈한 플랫폼이 되어준다. 가끔 봐도 반가운 얼굴들. 이들을 떠올릴 때 눈빛에는 생각이 어리고 입가에는 개나리가 핀다.
친구가 아닌 친구
친절함이 과하면, 말에 꼬투리를 늘 잡으면, 매사를 의심쩍게 보면,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잡지 않으면,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행동보다 말이 앞서면, 그 이름도 거룩한 친구라는 명찰을 달 자격이 없다.
어떤 이는 친구가 쓸데 없이 많은 것이 아니냐고,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곤 한다. 진심으로 대하는 이들만 친구 삼으라고. 그러기에 인생은 상당히 짧다고. 틀린 말은 아니나 어떤 시간대든 말을 섞기로 ‘선택’한 그들은 내게 양념이 다른 보양식(糧食)처럼 와 닿는다.
나의 친구 철학은 이처럼 카테고리 별로 세분화 되는 가운데 ‘관리’라는 이름 아래 크고 작은 에너지를 양산하며 삶의 순간 순간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일상을 켜는 스위치가 늘 분주 모드로 조준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정식의 푸짐함을 닮은 무지갯빛 관계는 먹지 않아도 부른 배 안의 공기처럼 정신을 팽팽하게 불린다. 형형색색의 관계가 때로는 피로함을 양산하나 복잡하고 미묘한 곡선을 그리는 에너지 분출이 싫지 않다. 교감의 향기가 진할수록 더한 행복을 느끼니 말이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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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2:45:06
<![CDATA[꽃 (2014-03-10)]]>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꽃을 싫어하는 여자가 있을까?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이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나 또한 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부류에 속한다. 아니 속했다. 고운 것을 좋아해도 꽃에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 몰랐다. 꽃을 선물로 받는 것이 싫었다. 화병도 장만해야 하고 물도 갈아야 하고 꽃도 다듬어야 하고 꽃잎이 떨어지면 주변을 치워야 하는 등 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도무지 반갑지 않았다. 꽃다발조차 사랑스럽지 않았다. 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나, 꽤 퍽퍽했다. 왜 그랬을까?
꽃에 마음을 주기 시작한 것은 집안 구석구석까지 사랑을 듬뿍 쏟아 ‘스위트 홈’을 일구도록 부추긴 중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도화선이 되었다. 정신 없이 출근하고 축 늘어진 채 귀가만 하던 사람에게 집을 꾸미는 일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꽃을 집에 들여야겠다고 굳힌 결심 뒤에는 프랑스 친구들의 운치 넘치게 꾸민 집이 미친 영향력이 크다. 거실에 들어서면 코끝을 찌르는 새하얗고 기다란 백합의 향내는 기분에 새 옷을 입혀주는 것 같았다. “난 꽃이 싫어요!”를 외치던 무덤덤한 주부는 동경 어린 시선으로 향을 내뿜는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꽃을 사보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동경은 그렇게 사람을 ‘따라쟁이’로 만들어버렸다. 꽃들과의 동거가 이루어지는 길목에서 마음 한 구석에는 정의하기 힘든 긍정의 감정이 자리잡았다. 자로 잴 수 없는 여유 한 줌이 건네는 기쁨에 눈뜬 시간. 꽃이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마술이 내게도 윙크를 보낸 것이다.
꽃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자 길거리의 이름 모를 들꽃의 때깔을 옷차림에 반영하는 것으로 나의 ‘예비 꽃 사랑’에는 불이 붙었다. 고백하자면 새롭게 고개를 든 꽃 사랑은 여기 저기서 팡파레를 울리는 울긋불긋한 꽃 그림과 꽃무늬 옷을 즐겨 입는 중국 여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 촌스럽다고 여겼던 알록달록한 꽃들이 옷을 고를 때 잣대로 적용되는 이변으로 이어지더니 생활 습관으로 안착했다. 이에 대해 친정 엄마는 야릇한 취향이라고 일축하신다. 타는 듯한 황토 빛 흙으로 물든 토양에 어우러진 꽃분홍 색의 철쭉과 초록빛 잎사귀를 렌즈에 담아 꽃분홍색 탱크톱과 초록빛 치마로 이루어진 옷차림으로 데려오니 그 느낌이 심히 ‘꽃스러워’ 꽃의 에너지에 그만 푹 빠지고 말았다. 어느새 난 옷을 색다르게 입도록 도모해주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면 꽃집에 들러 색감을 도둑질하는 여자로 변해 있었다.
꽃을 더 좋아하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꽃에서 훔친 색들을 귀고리에 고이 모시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귀고리를 구성하는 한 알 한 알에 저미는 꽃의 숨결을 사랑한다. 상상하지 못했던 색의 매력이 귀에서 잉태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어느 날은 장미, 또 어떤 날은 수국, 어떤 날은 진달래가 귓볼을 파티 분위기로 이끈다. 해바라기가 신경에 꽂히면 노란색 구슬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란색으로 물든 귀고리를 하면 해바라기가 된 기분이다. 그 날 하루는 명랑해야 한다고 되뇐다. 어처구니 없는 주문일 수도 있겠으나 효력이 있다. 결론인 즉 기분에 색을 입혀주는 꽃은 컬러 텔레비전 같은 존재다.
지난 달 집으로 꽃바구니가 하나가 배달되었다. 여느 때 같으면 꽃 선물에 지긋한 시선을 허락하지 않았을 터. 보낸 이의 마음이 실린 꽃들에 감개무량해진 심장. 꽃 선물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내를 익히 잘 아는 남편이 주문한 생일 꽃이었다. 이른 아침에 이미 생일 축하 전화를 받았기에 더 이상의 기대 같은 건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품에 안긴 꽃 더미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난데없이 웬 꽃이냐고 남편에게 물어보니 나이를 먹을수록 꽃으로 말하면 좋을 듯싶다는 명답이 돌아온다.
주름이 늘수록 말보다 꽃이 좋아진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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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2:43:54
<![CDATA[도전 (2014-02-10)]]>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아이를 무사히 잘 키우기. 회사가 저절로 돌아가게 만들기. 영적으로 성장하기. 탱고를 배우기.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며 살기. 마음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며 살기. 수험생 엄마가 되는 관계로 조금 덜 바쁘게 살기. 아이를 갖기. 시나리오 한 편을 쓰기. 전의 것보다 완성도 높은 책을 내기. 피아노를 배우기. 6년 전에 하던 일 다시 하기.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균형을 찾기. 신학대학에 다니기. 가사 도우미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기. 우선순위에 들지는 않지만 하면 좋은 것을 행하기. 오페라를 공부하면서 경청하기. 봉춤에 집중하기.
무엇 무엇을 해볼 것이라는 결의를 뒤따르는 행동은 생활을 움직이도록 가동시켜주어 삶이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독려한다. 삶 속에는 수많은 동사와 목적어들이 녹아 있고 무게와 느낌이 제 각각인 이들은 인생에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한다. 새해를 맞는 사람들은 으레 약으로 작용할 이 단어를 주시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겁과 용기를 동시에 퍼주는 이것,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도록 도와주는 이것, 살아갈 가치를 부여하는 이것, 이것 앞에서 심장은 팔딱거리다 작아지고 고민의 통로를 거쳐 부풀어 올랐다 움츠려 드는 등 압박이 아닌 압박이 찾아 든다. 이건, 기분 좋은 압박이다. 우리를 애쓰도록 밀어붙이는 이 힘의 이름은 도전이다.
말랑말랑한 도전은 없다. 도전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지 초조감과 불안감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능력의 한도를 늘여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도록 부추겨 준다는 점에서 제자리에 서 있고 싶어하지 않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택하게 되는 약이 아닐까 싶다.
도전에 대해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광적으로 살을 뺐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토록 바보 같은 짓이 무슨 도전이냐고. 대학교 1학년 때 나의 무모한 도전은 극한에 이른 다이어트라는 특명을 달고 실행되었다. 하루의 음식 섭취량을 8백 칼로리로 제한시켜 호리호리한 몸매로 가꾸고 싶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붙어 다닌 뚱뚱보라는 명찰을 떼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무지막지하게 비대해진 나머지 머릿속은 날씬한 여자의 형상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옷 가게에서 맞는 사이즈를 찾지 못해 생긴 낙심은 병으로 남았고 결국 맛난 먹거리와 마실 거리를 입에 대지 않는 상황으로 이끈 결과 투실투실했던 처녀는 이디오피아의 깡마른 여자처럼 변했다. 세상의 기아들을 생각하면 옳은 처사는 아닌 것이 분명하나 불가능과 부딪혀보겠다는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도전은 그렇게 나를 건드렸고, 소심한 여자의 불 같은 소심함을 덜어주면서 또 다른 도전이 꿈으로 전이되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올해 형체를 드러낸 나의 도전은 세 가지 유형의 건강 증진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제일 먼저 당면할 과제는 이른바 몸 가꾸기로 체계적인 근육과 유산소운동을 통해 중년의 신체를 단련시킬 계획이다. 작년 발가락을 다친 이후 발에 무리를 주면 안 된다는 의사의 금지 사항을 철석같이 지킨 결과 다부진 모양을 잡아가던 몸은 흐물흐물한 두부로 변했다. 헬스 트레이너의 엄한 가르침에 편승하여 몸 건강을 되찾는 일이 시급하다. 솔직히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렸을 적 뚱뚱했던 탓에 잽싼 움직임을 요구하는 체육 시간이 두려워 체육이 있는 날 아프기를 바랐다. 체력장이 열리면 소화장애에 걸린 듯 불안함과 불편함이 심신을 짓눌렀다. 그렇게 성장하는 사이 운동과 나는 남남이 되었다. 두 번째 도전은 세 번째 책 집필에 임하는 것이다. 2009년 첫 책을 낼 때의 다짐은 2년에 한 권씩 작업하는 것이었다. 4년이 지난 현재의 스코어는 두 권에 머물러 있다. 2011년 출간된 두 번째 책이 마지막이었다. 올 가을 새롭게 둥지를 틀 곳에서 대대적인 두뇌 노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게으름의 바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 정신도 가꾸지 않으면 망가진다. 마지막으로 덤비고 싶은 것은 팔찌를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한 손에 다 잡히는 귀고리에만 집중했을 뿐 좀 더 덩치 큰 알들이 들어가는 팔찌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귀고리 만드는 법을 배우는 동안 팔찌의 구슬들을 엮는 방법을 잠깐 익히긴 했건만 마무리를 짓는 과정이 난해하게 와 닿았던 까닭에 팔찌를 심히 좋아하는 데도 불구하고 온 신경을 귀고리에만 쏟았다. 귀고리를 조몰락거리다 보면 다채로운 질감과 색상, 크기를 조율하는 사이 1밀리미터씩 성장해 가는 감각이 만져진다. 감각이 빠진 삶은 슬프다. 몸과 정신만 일구어서는 멋이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으므로 어디선가 데려와야 하고 데려오기 위해서는 예술적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관심이 가면 뭔가가 느껴지고 그 느낌은 무의식 속에 잔상으로 남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표출이 된다. 감각은 삶의 빛깔을 풍요롭게 칠해준다. 블루 마운틴 커피가 입 안에 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잘 모르는 것, 안 하던 것, 알아도 자신이 없는 것에 노크를 할 때다. 마음이 허락하는 영역에서. 자신감과 자존을 취득하기 위해 도전은 보약이다. ‘자신’을 찾기 위해 탄생하는 각양각색의 도전은 세상을 성장시킨다. 그런 세상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슬그머니 미소가 그려진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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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2:29:29
<![CDATA[WISH (2014-01-14)]]>
WISH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으니 바야흐로 새해 소망을 빌 때가 되었다. 소망을 빌 때가 되니 새삼 이때껏 가졌던 소망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마음 속에 고이고이 품었기에 빛을 보았던 소망 의 조각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계속 귀한 선물을 가져다 주길 비는 마음. 바비 인형의 것처럼 아름다운 공주 드레스를 소유하기를 비는 마음. 공부를 더 잘하길 비는 마음. 엄마 친구들한테 예쁘다는 소리를 듣길 비는 마음. 대학에 합격되기를 비는 마음. 패션 공부를 파리에서 할 날이 오길 비는 마음. 근사한 남자친구가 생기기를 비는 마음. 헤어진 남자친구를 잊기를 비는 마음. 친구가 많이 생기길 비는 마음. 아들을 낳길 비는 마음. 다음의 승진 대상에 오르길 비는 마음. 당시에는 그토록 간절했건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퇴색되어 아련한 아득함을 남긴다. 살면서 비는 마음이 몇 더미를 이루는지 모르겠다. 바라는 것이 꽤 수두룩하니 말이다. 소망들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날씬하게 해달라는 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프랑스어를 구사해야 했던 스위스에서의 중학교 시절에는 옆 동에 사는 동생 뻘의 주재원 자녀만큼 프랑스어를 할 수 있기를 빌었다. 그들은 우리 가족보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을 먼저 시작했던 관계로 저학년 생 이웃 자매의 프랑스어 구사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 삶에 난데 없이 들이닥친 프랑스어를 거리낌 없이 입 바깥으로 내보이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온 고등학교 3학년 말 즈음해서는 대학 캠퍼스에 발을 디뎌놓는 것이 소원이었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졸업 후 파리로 유학을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유학을 마칠 무렵에는 취업을 기원하게 되었고, 원했던 잡지사에 취직이 되어 입지를 굳히게 되니 죽을 때까지 좋아하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는 무엇보다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마음이 앞질렀고, 남편의 일로 인해 한국을 떠나 외국에 거주하면서부터는 아프지 말기를 비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배가되었고, 커리어를 뒤로 하고 가정에 눌러 앉는 새로운 삶을 택하면서 빌게 된 소원은 꾸준한 독서와 머리 쓰기로 게으름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마음 속 가마에는 해가 바뀌면 새로운 희망의 불꽃이 들어서곤 한다. 갑오년 말띠로 다가오는 2014년, 내게는 세 가지 바람이 고개를 들었다. 첫 번째,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유명한 학교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가 지망하는 캠퍼스에 발을 내디디면 소원이 없겠다(아니다. 인간은 욕심쟁이라 또 다른 소원들이 등극할 것이다). ‘일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이다. 두 번째, 8개월 전 다친 발가락이 치유되기를 빈다. 존재감이 없던 전혀 뜻밖의 희망 사항이다. 어처구니 없는 부주의로 발가락이 침대 옆에 있던 의자 다리에 부딪혀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 뛰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럽다. 슬리퍼를 신은 수많은 맨발들을 보면 상념에 젖는다. 발가락을 다시 굽힐 수 있는 행복을 되찾고 싶다. 세 번째, 남편의 새로운 일터가 된 홍콩에서 우리 부부, 고운 그림 그리며 잘 살았으면 싶다. 기러기 엄마로 산지 어언 2년 반. 세 식구가 두 식구로 변한 여정에서 고개 든 팍팍함과 이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년 가을 아들은 우리 곁을 떠날 것이고, 우리 부부는 예전처럼 다시 함께할 것이다. 아들의 부재가 텅 빈 선물상자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의 자리가 비면 불안감이 비집고 들어온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기에 근심이 눈앞을 가린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간절히 원하면, 원하는 마음을 채우고자 쏟아 부을 에너지의 파워가 강해질 것이 분명할 것이며 그로 인해 앞을 향한 한 걸음에 힘이 더 들어갈 것이라고. 그것이 결국 한 해 한 해의 문을 힘차게 여는 원동력이라고.
이 글을 마치고 나면 컴퓨터가 놓인 책상 뒤로 마주 보이는 흰 벽에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소원을 크게 써서 붙일 생각이다. 매일같이 뚫어져라 쳐다보면 동공에 맺혔다 심장으로 전이될 것이요, 심장으로 전이되면 믿음 속에 꼭꼭 숨겨졌던 여백이 채워질 것만 같다. 뜨거운 소망으로 가열된 심장은 또 다른 일년을 가동시킬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고백하건대 소망을 하나 둘 셋으로 나열해 보기는 처음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유아적이 되어간다. 적어놓지 않으면 각인이 안 되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덧붙는 ‘불변의 소망’이 있다. 돌보지 않으면 눈깜짝할 사이 달아나는 것, 나약한 것, 바로 건강이다. 반짝이는 신규 소망도 건강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행될 수 없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건강을 다잡았으면 한다. 너무 뻔한 희망이자 소망이자 염원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더없이 소중해지는 ‘욕심’이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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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0:33:47
<![CDATA[옷 이야기 (2013-11-08)]]>
옷 이야기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옷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신기한 표정 반 웃음 진 표정 반을 내보이며 옷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냐고 묻는다. 그렇다. 내 곁을 지키는 옷들은 주인에게 쓴 소리 단 소리를 조잘거리며 나의 하루하루를 보좌한다. 어떤 옷은 제발 좀 입어달라고 떼쓰지를 않나 어떤 옷은 쉬고 싶으니 다른 옷 좀 입어 보라고 권하는가 하면 또 어떤 옷은 같이 어울릴 새 친구를 조달해 달라고 보챈다. 나의 이런 믿음은 미친 여자로 볼 확률이 높은 성질의 것임이 자명하다. 허나 어쩌랴. 비정상적인 믿음 덕에 매일 아침 하루를 여는 마음이 새로울 수 있으니 말이다.
옷을 그리도 아끼고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벌거벗고 살 수 없도록 해주니 외출할 때마다 밀려오는 감사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상상해 보라. 지하철 안, 카페, 버스 정류장, 파티 등의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를. 한 마디로 끔찍한 일이다. 옷에 감사하는 이유 하나 더. 신체의 단점을 감춰주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역할은 옷이 아니면 들어줄 수 없다. 품이 느슨한 원피스를 집어들 때마다 살그머니 고개를 내민 뱃살이 덮이면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화려한 프린트가 새겨진 의상은 구부리거나 앉을 때 접히는 살집을 교묘하게 보호한다. 무늬가 현란하고 색이 풍부히 들어가면 접힌 살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여러 가지 옷들은 저마다의 힘을 갖고 있다. 옷을 주제로 수다를 떨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나씩 짚어 보겠다. 원피스는 상의와 하의의 매치에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옷이다. 혼자 있어도 잘 사는 옷이다. 특히 일년 내내 햇빛을 보는 국가에서는 원피스가 폭 넓은 사랑을 받는다. 하나짜리 원피스를 입으면 일직선으로 쭉 뻗친 고속도로가 연상되곤 하는데 그 느낌이 시원하다. 그런데 원피스만 내내 입다 보면 심드렁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위아래로 조화시킬 다른 옷들을 찾게 되고 만다. 코디네이션을 도모할 뭔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청바지다. 전 지구인이 “싫다 좋다”를 논하지 않고 즐겨 입는 청바지는 생각할수록 대단한 옷이다. 남녀노소가 나이에 상관 없이 입는다는 사실이 위대하다. 지하철 안에서 청바지 입은 승객 수를 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다들 각자의 다리 길이에 맞는 청바지들을 찾아내는지 모르겠다. 청바지만큼 지위나 빈부의 차이 없이 누가 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옷이 티셔츠다. 티셔츠가 있어 몸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 아무리 사도 모자라지 않는 옷이다.
이처럼 몸에 여유를 선물하는 옷이 존재하는가 하면 긴장감을 건네는 옷도 있게 마련이다. 예의를 부여하는 재킷과 셔츠는 보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의 믿음을 갖도록 돕는 의젓한 맏언니들이다. 재킷은 격식과 거리를 둔 티셔츠와 청바지의 체면을 살릴 뿐만 아니라 어깨가 좁은 이들의 구세주이기도 하며 성장(盛粧)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옷인 까닭에 특별한 대접을 받음이 마땅하다. 셔츠를 떠올리면 마음이 청소가 되는 느낌이 든다. 모서리가 뚜렷한 반듯한 깃과 일렬로 늘어선 단추들, 군기가 들어간 소매산, 깨끗하게 다려진 몸판 등 셔츠의 올곧은 생김새는 행동에 아름다운 제약을 가한다. 셔츠가 남성이라면 블라우스는 여성이다. 솔직히 곡선 진 블라우스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날이 선 현대적 스타일만이 세련미의 잣대가 아님을 절감한다. 부드러운 시폰 자락이 살랑거리는 블라우스를 청바지와 함께 입으면 쿨하지 못하다고 확신했던 간들거림이 시크한 감(感)으로 전환된다. ‘시크’를 논하자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트렌치 코트다. 시크한 면모가 제일 앞서는 옷이 아닐까 싶다. 어떤 옷을 입든 트렌치 코트만 걸치면 스타일리시해 보이는(청바지와 티셔츠 차림부터 드레스까지) 점이 무엇보다 신기하다. 철저한 기능성에 바탕을 둔 트렌치 코트의 구조는 새빨간 트렌치 코트마저 난해하지 않게 느껴지도록 하니 1백60여 년 된 역사의 저력에 새삼 혀가 내둘린다.
옷 중에서 지혜롭다고 여기는 아이템이 있다면 피케 셔츠라고 말하고 싶다. 셔츠의 격과 티셔츠의 실용성이 보기 좋게 합쳐졌기 때문이다. 캐주얼한 차림 속에서는 우아하게 빛나고 포멀한 차림 위에서는 편안하게 돋보이는 양면성 덕에 피케 셔츠를 귀하게 대한다. 사람마다 편하고 불편한 옷이 제각각 일 것이다. 차이는 개인적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의거하겠지만 체형과 밀접할 확률이 높다. 그러한 맥락에서 바지는 신경을 비중 있게 건드리는 옷이다. 하체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달라붙는 나잇살이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바지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면 성묘하러 갈 때나 제삿날 큰집에 갈 때다. 조상을 모실 때는 통이 낙낙한 검은색 바지를 입는다. 패션이 좋아도 함께할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 법이다. 바지는 옷 입는 것이 귀찮게 느껴지는 날과 추운 날 입게 된다. 그렇다고 치마를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치마를 입는다면 발목까지 오는 플레어 스커트에 양말을 신는다. 치마는 “저 여자에요!”를 외치는 옷이라서 좋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를 스치는 치맛자락 그리고 치맛자락 밑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작은 미소가 쓱 귀에 걸린다. 여자로 산다는 미소 말이다.
모든 옷은 저마다의 생명력을 쥐고 태어난다. 예쁜 옷도 있고 덜 예쁜 옷도 있다. 왜 만들었는지 모를 미운 옷도 널려 있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 가에 따라 예쁜 옷이 빛을 잃을 수도, 그저 그런 옷이 빛이 날 수가 있다.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 맞게 입도록 훈련이 될 것이고 훈련이 되면 옷을 자연스럽게 소화할 것이다. 옷과 사람, 둘 사이가 통해야 옷도 살고 사람도 사는 가운데 일색의 조화가 생긴다. 조화는 멋의 어머니. 멋은 옷을 입는 즐거움을 낳는다. 옷을 즐기면 자신감이 찾아 든다. 자신감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는 생기를 빚고 생기는 사람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마술을 부린다. 옷은 생기를 전하는 매개체다. 내가 옷을 사랑하는 이유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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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1 Aug 2016 10:12:10
<![CDATA[색상의 힘 (2013-10-08)]]>
색상의 힘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색(色)이 없다면 무슨 즐거움으로 옷을 입을지 모르겠다. 검은색과 흰색 옷만 입는다고 상상해 보자. 매일같이 피아노 건반을 쳐다보는 느낌일 것이다. 물론 흑백이 주는 세련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련미도 지루해지면 돌파구가 필요한 법이다. 색상은 즐거움의 샘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감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볼 때 색상의 몫은 지대하다. 옷을 어떤 색으로 맞추어 입었는지 눈여겨보면 그 사람의 감(感)을 알 수 있다. 버스 안에서, 공항에서, 길에서,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옷차림은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내게 옷 입는 재미를 갖도록 뇌세포를 동분서주하게 만든다.
색을 잘 다루면 옷을 단순하게 입어도 심심하지 않게 보인다. 예를 들면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빨간색이나 초록색 카디건을 걸치면 전체적인 느낌이 산뜻하다. 강렬한 색상은 별다른 액세서리를 곁들이지 않아도 존재감이 크다. 그런 반면 감색(네이비 블루)이나 베이지 등 손이 쉽게 가는 차분한 빛깔은 방점이 될 만한 뭔가로 감각적인 동요를 불러일으켜야 생기가 돈다. 그 뭔가는 스카프가 될 수도, 브로치가 될 수도, 목걸이가 될 수도, 벨트가 될 수도 있다.
색을 자유자재로 조정하기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조정’은 색과의 관계가 가까워져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간파해야 한다. 좋아하는 색이 확실하지 않아도 눈길이 가는 색이 있게 마련이다. 없으면 찾아야 한다. 각종 포스터, 광고, 잡지, 그림, 타인의 옷차림, 식물, 하늘, 음식, 가게 진열품 등등 어딘가 발걸음을 멈추게끔 주파수를 보내는 색이 없을 리 없다. 색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카메라로 찍어 두고 틈이 날 때마다 꺼내본다. 팜플렛이나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색상이나 톤을 발견하면 눈 안에 아로새기기 위해 벽이나 문에 덕지덕지 붙여놓는다. 동공에 맺히면 의식에 스며들기 시작하고 어떤 옷에 손이 가게 된다(이 때 그 색을 둘러싼 여타 색까지 눈에 넣어두도록 한다). 옷차림 전체를 하나의 색으로 도배하지 않고 싶다면 함께 할 파트너 색을 찾는다. 처음에는 두 가지 색을 쓰도록 한다. 두 가지 색상에 익숙해지다 보면 변화를 주고 싶은 욕구에 제3의 색을 추가하고 싶은 것이 ‘좀 더 다르게 돋보이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게 실습을 하는 사이 색상 놀이는 조금씩 편해진다.
각각의 색을 쳐다보고 있으면 저마다 할 말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제일 센 걸! (빨강)”, “건강하게 살자!(초록)”, “난 항상 명랑해!(노랑)”, “마음을 비우자!(흰색)”, “누가 뭐래도 멋져!(검정)”, “사랑스러움을 더해주는 천사(분홍)”, “난 참 성숙하지!(회색)”, “여름 하면 나를 따라올 자가 없지!(파랑)”…… 이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내니 색의 유희에 흠뻑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더한 유희는 색과 색의 만남에서 경험한다. 그런 식으로 쌓은 나만의 원칙을 요약하는 단어는 ‘보완’이다. 검정과 흰색을 제외하고 완벽한 색은 없다. 어쩌면 빨강이 완벽에 가까울 수도 있다. 부족한 색 하나가 부족한 색 또 하나와 손잡고 힘을 불려 완연한 아름다움을 탄생시키는 것이 색의 책임감이란 생각이 든다.
점잖은 감색이 연분홍과 맞닿으면 연약함을 얻으며 여성스러워지고 흰색 옆에서는 정숙해지고 초록과 함께하면 산뜻해지고 검정과 손잡으면 다소 어두워지긴 해도 시크하다. 배색은 이같이 중요하다.
베이지를 예로 들어보겠다. 베이지 자체가 지닌 무난한 심성은 어디에나 어우러진다. 무난함은 중화제 같은 역할을 한다. 샤넬 여사의 사랑을 받은 베이지와 검정의 조화는 반듯하고 고급스럽다. 흰색과 마주하면 어딘지 ‘사파리적’이 되어 자연미가 두드러지면서 소박해진다. 그 소박함은 골드가 옆에 다가갔을 때 화려한 골드를 다정하게 토닥거려주는 포용력으로 탈바꿈하여 튀는 수준의 격을 한 단계 상승시킨다. 정도를 걷는 면모가 훌륭한 색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루하루 옷을 어떻게 입을지 망설여질 때 색은 똘똘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 날 그 날의 기후는 내게 색을 암시해 준다. 창 밖으로 햇빛이 선명하면 내 마음은 이미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잔뜩 구름이 끼면 환한 핑크나 오렌지 등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밝은 색이 날씨를 닮고 싶어 칙칙해진 기분을 전환시켜 준다. 비가 오면 빗물이 튀어도 티가 잘 나지 않는 검은색으로 입는다.
색의 마력은 거부하기가 힘들다. 유행이라는 이름의 소용돌이에 이끌려 소위 "트렌드 컬러’에 촉이 한 번 꽂히면 그 색이 머릿속에서 계속 노래를 한다.
멋을 아무리 내도 색을 잘못 쓰면 소용 없는 일이다. 옷을 잘 입을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줄기차게 색을 활용해보라고 조언한다. 티셔츠, 셔츠, 카디건, 바지, 치마, 원피스. 늘 접하는 뻔한 옷들이지만 자신만의 색의 궁합을 찾으면 감각적으로 피력된다. 나의 규칙은‘쉬운 옷’에 색을 더하는 것이다. 빨강은 확신, 검정은 패션, 노랑은 젊음, 분홍은 감성, 초록은 휴식, 보라는 멋, 파랑은 여행, 주황은 동심……빨간 입술, 여고생의 남색 교복 치마, 길 가상자리에 핀 주홍색 꽃들, 케이크의 파스텔 빛, 진열장 속 마네킹 위에서 빛나는 형광 빛 옐로, 황토색 건물 벽과 교차하는 종려나무의 고개 떨군 잎자루, 빛 바랜 어느 식당의 나무 식탁, 멋쟁이 친구의 팔목에서 묘한 화음을 들려주는 산호 팔찌와 금 팔찌, 증권회사에 다닐 법한 남자의 말끔한 옥스퍼드 셔츠. 터키석 귀고리, 빨랫줄에 걸린 꽃무늬 원피스, 성심껏 차린 모양새가 신사의 향내를 풍기는 할아버지의 회색 양복 바지. 도처에서 숨을 내쉬는 색은 영감의 소중한 원천이다.
미운 색은 없다. 관심을 가져주고 짝을 제대로 찾아주면 말이다. 짝을 찾는 일은 쉽지는 않으나 주변을 살피면 보기 좋은 색이 신경을 잡아 당길 것이다. 그렇게 색을 주시하다 보면 어느 새 멋과 용접하는 날이 올 것이다. 색과 지내온 지난 시간을 곱씹어 보건대 거듭 드는 생각은 색과 색의 만남은 끝이 없는 연구 대상이라는 것. 색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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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31 Jul 2016 17:22:35
<![CDATA[내게 행복은... (2013-09-09)]]>
내게 행복은...
사진·글 : 김은정 (패션 칼럼니스트)
한국을 떠난 지 6년이 넘었다. 떠나기 전 일은 내게 가족 다음으로 애지중지하는 행복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일은 나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스스로 여기도록 만들었고 나는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줄 알았다. 패션 에디터들을 매일같이 만나면서 새로운 매력으로 가득한 계절의 신제품과 호흡하는 특성을 지닌 직업을 뒤로 한다는 생각은 기필코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 있는 자리에 머무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대사(大事)가 벌어졌다. 남편이 중국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가족 모두가 중국의 남부 도시 선전으로 둥지를 옮겨야만 했다. 고백하자면 중국은 내 안에 자리를 못 잡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마오쩌둥의 공산국가라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돼 있던 터라 호감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는 다짐을 하게 되면서 13억이 숨 쉬는 땅을 향해 나는 몸을 틀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중국은 더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희망의 시장이었으니 그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내심 “괜찮다”를 외치며 긍정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국제학교로 보낼 수 있다는 것, 홍콩을 이웃으로 둔다는 것(선전은 홍콩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제2외국어로 부각되는 중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책을 싫증 날 만큼 읽을 수 있다는 것, 좀 더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 사춘기에 접어 들 아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등등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득이 적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세계의 이목을 잡아 당기는 중국에 가는 것이 우리 세 식구의 미래에 힘이 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행복을 안겨줄 가능성이 점쳐지자 미련 없이 ‘떠남’을 선택했다.
2013년,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놓쳐 버릴 것만 같던 행복은 그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샴페인 잔을 집는 일도, 일년에 비즈니스 석을 타고 파리에 두 번 이상 가는 일도, 은행계좌에 다달이 급여가 입금되는 일도,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명함을 주고받는 일도, 유명한 디자이너를 인터뷰할 일도 없지만 이상하게 행복하다.
차 한 잔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마들이고 출장이 사라지는 바람에 단번에 적립되는 마일리지도 척박하고 월급이 없으니 내 돈 내 마음 가는 대로 쓰지도 못하는 낯선 상황으로 변했지만 새로운 행복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뒷맛을 남긴다. 예전 누군가와 약속해서 만나면 일이 이유와 빌미가 되어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 중심으로 흘러가곤 했다.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별다른 고민을 할 필요를 못 느꼈다. 내게 힘들었던 것은 주부들과의 대화였다. 공통 분모를 모색하는 데 안간힘을 다하는 신경세포의 무게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아이와 음식, 시댁에 관한 이야기로 온 시간을 보내는 대화의 패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엄마 개인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주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노력하는 자세로 임하니 보다 폭 넓은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패션이 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아도 재미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행복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집안 일에서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매달 감당해야 하는 잡지 마감과 연이은 미팅을 대비한 프레젠테이션 준비로 청소와 빨래, 음식은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의 몫이었던 나머지 나의 살림 점수는 빵점이었다. 중국식 요리를 접하면서 담백한 채소 볶음을 한 접시 후다닥 대령하는 노하우와 집안 어딘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모든 수를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뚝심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세탁기와 갖가지 세제, 걸레와 친해지니 떳떳함까지 누리게 되었다. 또한 삶을 영위하는 공간을 꾸미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허나 그 무엇보다 값진 선물은 사춘기를 겪을 참에 놓인 아들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손맛이 담긴 간식을 준비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들 왔어?”를 외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아이가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 하는 일을 뒤로 하고 아이 뒷바라지 하며 사는 삶이 어떠냐는 뭇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또한 굉장한 직업이라고. 집이 숨을 쉬게끔 동분서주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눈에 잡힐 때마다 전원 스위치에 묻은 때를 지우고 때 되면 침대 시트를 갈고 싱크대의 파이프에서 물이 새면 수리공을 불러서 고치고 옷 사이사이 건습제로 영양을 공급하고 햇살이 찬란한 날에 부리나케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널고 식탁에 새 옷을 입혀주고 쇠고기 무국을 끓여 입맛 도는 냄새를 피우고 질 좋다는 프랑스 면으로 만든 쿠션 커버로 작은 거실을 모양 나게 하고 각종 고지서들에게 제 자리를 마련해주고 TV 광고에서 본 신제품으로 바닥을 닦아보고 반반하게 마른 티셔츠들에게 웃음을 한 줌 퍼주고.
“행복하세요?”
누군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나의 고개는 망설임 없이 끄덕여진다. 담담한 하루하루에 그저 감사하고 그리운 지인들을 다시 볼 설렘에 마음은 더없이 부유해진다.
그리고 나직이 되뇐다. ‘떠남’의 길을 잘 선택했다고. 이국에서의 삶은 내게 열린 사고와 배려를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
English
Happiness to me…
Written & Photo by Eunjeung Kim (Fashion columnist)
Translated by Sua Serena Min
It has been six years since I left Korea. Before leaving, my work meant my happiness, second to my family. I was glad I was good at something I like to do. My work made me feel special about myself and I believed this to be the most genuine happiness. It never crossed my mind to leave this remarkable job where I get to meet fashion editors and encounter the charming new products every season. I was certain that I would stay in my place for a long time.
Then, something huge happened. My whole family had to move to Shenzhen, a southern city of China, due to my husband’s work. To be honest, China had no place in my heart. It was only natural for me to feel this way about China based on the negative images portrayed by the general community. But I had to no choice so we headed to the country of 1.3 billion people.
To my husband, China was a market of promise. I didn’t want to be the one to throw a wet blanket on his dreams. I kept telling myself, “It’ll be alright.” In fact, I thought of lots of positive aspects. I will be able to send my child to an international school, live near Hong Kong, learn Chinese, read lots of books, live in a larger house, and spend more time with my teenage son. After much consideration, I realized that going to China was the right decision for our family. I was persuaded by the idea of new happiness I can seek there.
What I can say at this point is that the happiness I thought I would miss did not go anywhere. I no longer pick up fancy champagne glasses at fabulous events, or ride business class to Paris twice a year, or receive my paycheck monthly, or meet creative people on daily basis, or conduct an interview with a famous designer. But oddly enough, I was happy.
Now, the people I usually meet are just regular moms. My flight mileage points are stagnant. I have no salary and so I tend to spend less money than I used to. But this new kind of happiness leaves a special aftertaste. When I used to work, meeting people was so easy because we usually had a topic to discuss and our conversations flowed very naturally.
It was the conversations with the moms I had trouble at first. I felt my nerves getting exhausted from trying to find some common grounds with these women. That was because I was not used to talking about kids, food, and in-laws for all day long. I was more interested in the moms themselves. It was important to show them my interest. I approached everyone with an attentive attitude and I was able to share friendship with a wide range of people. I was having a great time even without talking about fashion.
Another place I found my new happiness is in the house. When I had to deal with monthly deadlines and numerous presentations, cleaning, laundry, and cooking were entirely my housekeeper’s responsibility. Now, I can easily make a fried vegetable dish in a heartbeat and I know how to manage every little function in my house. Moreover, getting close to house chores even brought me a sense of confidence. I felt the pleasure of decorating our place of living. But the most valuable gift was being close to my teenage son. I can make his snack with my own hands and give him the memory of his mom greeting him as he returns home from school.
People often tend to ask me how it feels to leave something I was good at to support my family. I tell them that this is also a great job. I like myself running around the house busy.
I clean the dust off the power buttons, change the bed sheets regularly, call the plumber when our faucet is leaking, keep our clothes neat, do the laundry on a bright sunny day, cook delicious soup for the family, decorate the living room with French cotton cushions, organize the bills, mop the floors with the new cleaning product I saw on TV commercial, and iron the shirts.
“Are you happy?”
If someone asks me, I nod my head without hesitation. I am grateful for each day and feel blessed by the anticipation of meeting my loved ones.
And I tell myself that it was a good thing I left. My life in this foreign country taught me to open my mind and to be considerate.
_Eunjeung Kim majored in French Literature at Ewha Womans University and Stylism at ESMOD PARIS. After working in Paris for several years, she returned to Korea as a fashion editor of ELLE Magazine. She has worked as a fashion and beauty director for ELLE KOREA and Marie Claire KOREA, followed by Madam Figaro KOREA as the chief editor. Later she has worked for Chanel KOREA as a PR director. She is currently residing in Singapore, and by writing fashion columns for Korean fashion magazines. she stays close to the fashion world every moment. Her publications include Leaving Living Loving (2009) and Story of Clothes (2011) ⓒPhoto by Jin Soo Lee
日本語
私にとって幸福とは…
文・写真 : キム・ウンジョン(ファッション・コラムニスト)
Translated by Kong Sung-eun
韓国を離れて6年が過ぎた。出発前、仕事は私にとって家族の次に珍重した幸せだった。
好きなことが出来て幸せだった。仕事は自分自身を重要な人として自ら思うように作り上げ、私はそれが最高の幸福であると思っていた。ファッションエディター達を毎日のように会いながら、新たな魅力に満ちた季節の新商品と息を合わせる特性を持った仕事を後回しにするという事は考えたこともなかった。
末永く、そのように、座っていた場所に留まるだろうと確信していた。
ところが、突然大事が起きた。夫が中国に転勤が決まり、家族全員が中国の南部都市深圳に引っ越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告白すると中国は私の中でまだ落ち着かない国であった。それもそのはず、中国の多少否定的なイメージが強かったため、好感を持つ事が容易ではなかった。しかし、どうすることも出来ない。その他の選択は出来ないと確信するようになり、13億が呼吸する土地に向かって私は方向を変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夫にとって中国はまたとない機会を提供する希望の市場だったため、彼の期待に水をさすような事は出来ず、私は内心“大丈夫”を叫びながら積極的に考えるようになった。子供をインターナショナルスクールに通わせる事が出来る事、香港をお隣に置けること(深圳は香港のすぐ隣に位置している)、第2外国語として注目されている中国語を学ぶことが出来る事、本をうんざりするほど読めること、もう少し広い家に住むことが出来る事、思春期に入る子供のそばにいることが出来る事など、いざ箱を開けると得なことが少なくなかった。悩んだ末に下した結論は、世界の人目を引く中国に行くことが私の三人家族の将来に力になるということだった。もう一つの幸せを抱かせる可能性が予想されると未練なく、「去ること」を選択した。
2013年、現時点で言えることは逃してしまいそうだった幸せは何処にも行かなかったということだ。ショーに入り、シャンパングラスを手にとることも、毎年、ビジネス席に乗ってパリに2回以上行くことも、銀行口座に毎月の給与が入金されることも、創造的な仕事をする人たちと頻繁に名刺を交わすことも、有名なデザイナーをインタビューすることもないが、不思議なことに幸せである。
お茶をする人々はほとんどママさんたちで、出張がなくなり一気に貯まるマイルも減り、給料もないので私のお金も自由に使うことも出来ない見慣れない状況に変わりましたが、新しい幸せは、以前に経験したことのない後味を残す。以前は誰かと約束をして会うと仕事が理由と口実になり会話は自然と仕事中心に流れたりした。会話を続けるのに何の心配をする必要性を感じなかった。
私にとってもっとも難しかったのは主婦たちとの会話だった。共通点を模索するため全力を尽くし、神経細胞の重さに耐えるのが難しかった。子供と食事、嫁ぎ先の話で時間を過ごす会話のパターンに慣れていなかったからだ。それよりもママさん個人について聞きたい気持ちが大きかった。そのためには相手に対して関心を表明することが大事であると考えた。向き合った相手がどんな人なのか、知ろうと努力する姿勢で臨んだら、より幅広い出会いを享受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ファッションがいつも中心を占めていなくても楽しみがあった。
一方で、新しい幸福は厄介極まりない家事からもあげることが出来る。毎月、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雑誌の締切りと続くミーティングを備えたプレゼンテーションの準備で、炊事洗濯は家事お手伝いさんの仕事であったため、私の家事の点数は0点だった。中国料理に接してから淡白な野菜の炒め物を一皿サッと出せるノウハウと家の中の機能がちゃんと動作しない場合は、すべてを動員してでも問題を解決する根気もできた。それだけではなく、洗濯機や色んな洗剤、雑巾と親しくなると堂々しくなった。また、生活を営む空間を飾る楽しみも知った。だけど、何よりも大事な贈り物は思春期に置かれた息子のそばを見守る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だ。手作りの味が詰まったおやつを準備して学校から帰ってくると“息子、来たの?”と迎える母の記憶を子供が大事に思ってくれたらと願うばかりだ。
得意なことを後に回し、子供の世話をしながら生きる人生はどうか?という質問をする人たちの質問に私はこう答える。これもまた素晴らしい職業だと。家が息をするように東奔西走する今の私の姿が好きだ。
目に付く度に、電源のスイッチについた汚れを取り、時になるとシートを引き換え、シンクのパイプから水が漏れると修理を呼んで修理し、服の間に乾湿剤で栄養を供給し、日差しが輝かしい日には急いで洗濯機を回して洗濯物を干して、テーブルの上に新しい服を着せてあげ、大根の牛肉スープを作り、よだれが出そうな匂い、質の良いフランス製のコットンで作ったクッションカバーで小さなリビングをコーディネートし、各種の請求書たちに定位置を設け、コマーシャルで見た新製品で床を磨いてみる、程よく乾いたTシャツたちに一握りの笑いを与える。
“幸せですか?”
誰かがこのように聞くならば、私は迷わずに頷くだろう。淡々とした日々にただ感謝して、懐かしい知人たちに再び会えるというトキメキの気持ちはこの上なく豊かになる。
そしてぼそりと繰り返し言う。“去る”の道をよく選択したと。異国での生活は私にオープンな思考と配慮を教えているからだ。
_キム・ウンジョンは梨花女子大学の仏語仏文学科とフランスのパリ・エスモードでスタイリズム学科を卒業した。パリで働き、ファッション雑誌「ELLE」が国内に入ってくるというニュースを聞き、ファッション・エディターの願望を抱いて韓国に戻る。ファッションライセンス雑誌「ELLE KOREA」、「Marie Claire KOREA」でファッション&ビューティーディレクター、「madam figaro KOREA」で編集長を務めた。以降、「CHANEL KOREA」で広報部長を務めた。現在はシンガポールに居住し、ファッションに関する記事を韓国のファッション雑誌に寄稿し、ファッション・コラムニストとして活動し、ファッションの紐を一瞬も話さずに生きている。著書としては「Leaving Living Loving」(2009)、「服の話」(2011)がある。 ⓒPhoto by Jin Soo Lee
中國語
對我而言幸福是…
文章・照片: Kim Eun-jeung (時尚·專欄作家)
Translated by WenYing, Li
離開韓國6年了。出發前、工作對我來說是僅次於家族珍貴的幸福。
可以做自己喜歡的事真的很幸福。 工作是作為對於自己很重要的人親自精心製作出自己想要的樣子、我曾認為那就是最好的幸福。就像每天一樣地一邊見著時尚編輯們、一邊要擁有與充滿著新的魅力的季節的新商品配合呼吸的特性、不曾想過要將工作延遲。
確定了應該會長久的、像那樣、停留在坐著的地方吧!
然而、突然發生了大事。 丈夫的工作確定被調動到中國、家族全員必須搬到中國南部的城市深圳。 坦白說在我的心裡中國還是不安定的國家。那也是當然的、對於中國有些否定的印象較強烈、要有好感並不是容易的事。可是、也不能怎麼樣。變的確定沒有其他的選擇、朝向13億人呼吸的土地我必須改變方向。
因為對丈夫來說中國是提供無比的機會的希望的市場、不能在他的期待中澆冷水、所以我內心一邊呼喊著"沒問題"一邊變得積極地思考。 能讓孩子上國際學校、旁邊就是香港(深圳位在香港的旁邊)、第2外語可以學習受到重視的中文、能看書看到膩、能住在再稍微寬廣一點的房子、能待在進入青春期的孩子身邊、當必須打開箱子時好處並不多。 煩惱的結果作出的結論是、去引世人注目的中國將來能成為我們家族三個人的力量。覺得可能擁有另一個幸福沒有依戀地、選擇了「離開」。
2013年,在這一刻可以說的是差點放棄的幸福就是哪裡都沒去。參加時裝秀、手持香檳杯、每年搭乘商務艙2次以上去巴黎、銀行戶頭每個月的薪資入帳、與創作者的人們頻繁地交換名片、都沒有採訪有名的設計師、不過、很不可思議的是很幸福。
一起喝茶的人幾乎都是媽媽們、因為沒有出差了所累積的里程數也減少了很多、也因為沒有收入所以不能自由的使用我的錢變成了看不習慣的狀況、不過、新的幸福是、留下了以前所沒有經歷過的事。 以前與人約見面工作成為了理由與藉口、對話野自然的以工作為中心。 沒有感到過必須擔心持續地對話。對我來說最難的就是與主婦們的對話了。 為了摸索共同點竭盡全力、要承受神經細胞的重量好難。 因為不習慣將時間用在與孩子吃飯、婆家的話題的對話模式上。比起那個比較想聽關於媽媽們個人的事。為此我認為表明關心對方很重要。 無論面對的對方是怎麼樣的人、面臨了努力了解的態度、變得能夠享受更廣泛的相遇。時尚即使沒站在中心也有樂趣。
另一方面、新的幸福從麻煩至極的家務也能取得。 因為每個月、必須做的雜誌截稿與接著準備會議上的發表、而煮飯洗衣是傭人的工作的關係、我的家務的分數是0分。 接觸了中國料理之後能快速的炒出一盤淡白色蔬菜的訣竅和家中的功能不做動作的情況、就算全家總動員也有解決問題的耐性了。不僅僅只有那樣還有、與洗衣機和各式各樣的清潔劑、抹布變得親近並且變得理所當然的。還有、也了解了參與生活裝飾空間的樂趣。可是、比什麼都重要的禮物是能在身旁關注著正值青春期的兒子。 準備都是手工味道的點心、從學校回來時”兒子、來了嗎?"迎接著孩子的母親的記憶只希望孩子能感到很重要。
將擅長的事情往後延、一邊照料孩子一邊活著的人生是怎麼樣的?對於問這樣問題的人們我是這樣回答的。這也是很好的職業。就像家在呼吸一樣地我喜歡東奔西走現在的我的姿態。
只要眼睛看到了、把電源開關上的汙垢擦乾淨、有時候交換坐墊、水槽的管水漏水時請人來修理、衣服之間用乾濕劑提供營養、陽光耀眼的日子趕快用洗衣機洗完衣服後晾乾、給桌子上面穿上新的衣服、製作蘿蔔牛肉湯、口水快流出來的味道、 用材質好的法國製的棉製作靠墊的套子裝飾小客廳、設置各種的帳單們的位置、在廣告上看到新產品試著刷地板、適當地對乾燥的T恤們給予少數的笑容。
“幸福嗎?”
不管是誰如果這樣問的話、我會毫不猶豫的點頭。 對於平淡的日子只有感謝、能再次遇見懷念的熟人們這樣心跳的心情變得無比地豐富。
然後又小聲的重複說。選擇了"離開"的道路做的很好。因為在異國的生活教會我開放的思考與關懷。
_Kim Eun-jeung畢業於梨花女子大學法語法國文學科與在法國的巴黎•ESMOD造型學科。在巴黎工作、聽說時尚雜誌「ELLE」進入國內這個新聞、抱著時尚•編輯的願望返回韓國。在時尚進出口許可證雜誌「ELLE KOREA」、「Marie Claire KOREA」擔任時尚&美容導演、在「madam figaro KOREA」擔任主編。 之後、在「CHANEL KOREA」擔任宣傳部長。 現在居住在新加坡、將有關時尚的報道投稿韓國的時尚雜誌、作為時尚•專欄作家活躍、活在沒有一刻不談論時尚中。 著作有「Leaving Living Loving」(2009)、「衣服的話」(2011)。 ⓒPhoto by Jin S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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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 30 Jul 2016 22:5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