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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 미래의 가치를 품고 있는 서울 한양도성에서
      우리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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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Ep.08 친구들의 순성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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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Ep.08

    김남길, 친구들의
    순성놀이

    2016년 11월 1일

    간밤 달이 환하기에 박제가를 찾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을 지키던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풍채 좋고 수염이 난 양반이 누런 말을 타고 왔다가 벽에다 글씨를 써놓고 갔습니다.

    그래, 등잔으로 비춰보니 바로 그대 글씨입니다.
    손님 온 것을 알려주는 학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문에다 글을 쓰는 봉황이 있음을 기쁨으로 압니다.

    미안하구려.
    다음에는 감히 달 밝은 밤에 밖으로 나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박지원이 막역지우였던 홍대용에게 보낸 짧은 서신. 지금 봐도 가는 길 엇갈림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생생하다. 자신이 잠깐 이웃에 마실 간 사이에 다녀간 벗이 허탕을 치고 돌아간 것을 알고 미안해하는 그 마음. 그 밝은 달밤을 헛되이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했다.

    낮이나 밤이나 책만 읽다 지금이 몇 시인 지도 몰랐다던 연암 박지원. 조선의 영조와 정조 시대 사이를 살았던 실학자이자 소설가다. 지금의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에 모여 시시때때로 벗들을 만나 우정에 살고 우정에 죽던 희대의 사랑꾼 선비, 박지원.

    평생지기들과 삶의 희로애락을 누리며 살고자 했던 사람

    그런 그라면 과연 누구와 순성놀이를 했을까? 아마도 조선 팔도의 별별 사람들과 한 해에도 몇 번이고 순성장거를 했을 것만 같다. 장터로 나가 노인과 어린 광대와 상인 등 다양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며 어린 시절부터 겪던 우울증을 다스렸던 남다른 소년이었으니 말이다.

    그 자신이 인생의 전성기라고 했던 탑골 근처, 한양도성 안에서 살던 시절에는 백수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산골에서 한양도성 곳곳에서 찾아 든 지기들과 이야기하느라 하루 종일 한가한 때가 드물었다. 그렇게 평생을 사람들에게 마음이란 마음은 모두 내 주던 정 많은 사람이었다.

    함께 책을 읽으며 글과 술을 나누던 지기들.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던 이야기들은 그렇게 사시사철 끝을 모르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모이기만 하면 한바탕 두둥실 춤을 추는 흥 많은 그들에게 한양도성은 그 수려한 풍경을 뽐내며 유혹했을 것이다.

    그 깊고도 깊은 우정의 길

    어쩌면 그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서 함께 술을 나누던 친구, 덕보(홍대용의 별칭)와 함께 순라군들을 피해 월담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조선의 하늘과 별자리, 이 우주의 운용에 대해 눈을 빛내며 말하던 이 천진난만한 사우와 함께라면 성문이 위치한 언덕배기에서 밤하늘 별을 헤아리며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것 같다.

    평생을 한양도성을 내다보며 살다가 깊은 산중 먼 성 밖, 연암골로 도망치다시피 쫓겨난 시절에, 그렇게 성문을 나서 한양도성과 작별할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봄이 와 봉숭아 꽃이 뿌려진 한양도성 길을 산보할 수도 없고, 그 어느 때든 훌쩍 집을 나서서 하던 순성놀이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연암골에서의 많은 날이 지나가고 그 섭섭한 마음이 지쳐갈 때,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한양도성 밖 세상으로 여행했던 박지원. 그가 요동 벌판을 넘어 청나라의 열하로 가는 길 위에서 배고픔을 참아가며 선잠이 들던 때를 상상해 본다.

    한양도성 곳곳에 보석처럼 박힌 일화들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것이다

    아련한 꿈처럼 그 오래전 탑골에서 벗들과의 시간을 단잠처럼 꿈꿨을까. 밤낮으로 사우들과 이야기하고 한양도성 안과 밖을 유람하던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한양도성 어디든 통하는 성문과 그 사이로 흘러가는 성벽을 따라 달라지는 절기를 느낄 수 있었던 축복받던 순간도,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풍경을 이고서 걷는 순성길도, 그 곁에 언제고 등장하는 그리운 옛 벗들의 모습도 나왔을지도 모른다.

    열하에 도착하자마자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낯선 사람들과 오랜 친구처럼 지내며 밤이고 낮이고 필담을 나눌 때도 세상 만물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분명 그가 두고 온 한양도성의 풍경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 기억에 담긴 한양도성의 사계절, 성문 근처에 난 장터 그리고 그 작은 샛길들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그의 이야기 속에 담겼을 것이다. 먼 이국 땅의 새로운 벗은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먼 나라의 신비로운 한양도성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을 것이다.

    조선 어느 동네에서 왔냐 물으면 그 필두로 이어졌을 고향 이야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어느 장소의 풍경이든 있는 그대로 박제해 살아있게 만들던 문장가였던 그가 당대 한양도성에 대해 남긴 수필이 숨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그 수많은 문집들 중에 벗들과 함께한 순성놀이가 담긴 한 토막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듯 한양도성과 함께한 사람들을 좀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기억하는 삶은 언제고 풍요로울 것이다. 언제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결국에는 그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물들어 자연히 다른 시공간을 선물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아마도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이 있다면, 그는 함께 마음을 나누며 오래도록 이야기할 지기를 두는 일이라 말해 줄 것 같다.

    긴긴 대화를 해나갈 벗과 함께 걷는 한양도성의 길

    만남 속에서 샘솟는 글을 쓰며, 자신과의 긴긴 대화를 이어가며 완결된 삶을 살았던 박지원. 그가 만약 시대의 풍운아라면, 그의 재능 때문도, 명문 세도가의 일원으로 큰일 없이 산 운명 때문도 아닌, 벗들과 함께한 그 모든 사소한 순간들 때문일 것이다.

    아픔에 같이 울분을 토하고, 기쁨에 함께 뿌듯해하며 한양도성에 피고 지던 모든 풍경들을 동감할 나의 소중한 벗. 모두의 친구가 아닌 아주 사적인 나만의 친구. 그렇게 함께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긴 대화를 해나갈 벗과 함께 걷는 한양도성의 길을 상상한다.

    서사가 있는 삶

    해마다 바뀌고, 계절마다 변화하는 순성길을 아무 말없이 걸어도 공허하지 않을 우리. 그대와 나눈 평범한 대화가 십 년을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들보다 낫다는 걸 두고두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한다.

    어느 순간 채워도 채워도 텅 빈 것만 같은 시간 속에 머물지 않고, 한양도성의 순성길에서 벗들과 긴긴 만남으로 온갖 이야기를 자신 안에서 지어내던 박지원, 그 사람처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가 있는 삶을 이뤄내기를 바라게 된다.

    그것만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결코 공허해질 수 없는 기억으로 삶을 완결 짓는 거의 유일한 길이지 않을까. 앞으로 이 다정한 한양도성의 길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동시에 흠모할 수 있는 그런 고은 벗이 되기를 바라본다.
    by 김남길
    "아래 소개하는 영상은
    <길스토리: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프로젝트>의
    시민 참여자 '이강구'씨가 직접 촬영한 영상으로
    '순성놀이'를 주제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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