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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가영의 LES ESSAI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Gayoung Lee
    Writer
    이가영 / 상세보기
    시간의 뿌리
    추천수 260
    조회수   2,619
    시간의 뿌리
    글 : 이가영 (작가)

    ‘The fox hunt’ 1893년. Winslow Homer(1836. 2.24~1910. 9. 29)’
    “인생은 불균등하고 불규칙하며 형태가 여러 가지인 운동이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
    무릇 신년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새로운 다짐과 따듯하면서도 든든한 오래된 격언들이 하늘 곳곳에 구름처럼 걸려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때를 잊지 않고 언제든 찾아오는 공기 같은 습관 또한 그대로 그 자리에 어김없이 느긋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삶에서 꽤나 자주 찰나의 결심이 존재하고, 다시 별일 없이 방금 전의 모든 다짐을 까먹게 만드는 어떤 운명적인 기질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꼭 뫼비우스의 띠를 온몸에 두른 듯이 습관이라는 자잘한 듯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운명을 안고 오늘도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물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섬광처럼 단번에 찾아와 단번에 스며들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이야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일이고 대부분은 나만의 변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 습관이 인생에 중대한 결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령 지금까지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하다못해 가위가 어제 방금 썼던 포스트잇을 분명 봤는데 당장 없어서 허탈했던 그래서 다시는 정리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곳이 어디든 똑같이 반복하는 걸 다시 보고 있자면 이쯤에서 항복하고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다.
    | 오늘도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
    어느새 다시 새해가 다가오고, 여전히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물건 없이 살고 싶기도 하지만 그거야 물건들의 잘못이 아니니,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불평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아주 잠시 잠깐 그들 스스로 움직이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차라리 그래서 지금까지 그토록 우산을 들고나갔다 매번 잃어버렸던 이유라면 위안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현실을 회피하는 자잘한 망상이 아닌가. 그저 그 스스로 원래 두던 자리에 놓기만 했으면 되는데, 왜 시시때때로 물건 배치를 바꾸냐는 말이다. 무엇보다 그걸 지금까지 십수 년 반복하고서도 마치 살갗에 들러붙은 피부나 지방처럼 그토록 고집스럽게 그 비루한 행동을 무슨 대단한 운동처럼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기이할 뿐이다.
    | 현실을 회피하는 자잘한 망상
    물론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정리를 못한다. 심지어 저장 강박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폐품이나 공병 심지어 택배 박스도 안 버리고 종국에는 쌓아두는 사람들도 있는데 차라리 자주 깜빡하는데 낮지 하면 조금은 덜 창피할까? 아니, 지금 다시 변명거리를 찾고 또다시 새해맞이 겸 스스로 정신 승리를 이룩하려는 게 아니라면 전혀 생산적인 생각은 아니다. 지금까지 잃어버리고 지워지고 다시 그걸 찾고 초초해 하느라 보낸 분초를 모두 합하면 이미 최소한 삼 년 이상은 썼을 테니,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 오늘부터 완전히 달라지기로 결심했어! 두 주먹을 불끈 쥐지만 또 완벽하게 잃어버렸다. 다시 그 서점에 가서 블루 벨벳 리본을 단 빨강 머리 소녀가 그려진 표지의 소설을 찾아야지 했는데 그새 까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쪽지는 어딜 찾아 봐도 없다. 대체 어느 책에 끼워 둔 것인가? 애초에 메모를 쓰지도 않았나? 이상한 영수증들도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하필 그 메모만 없나. 평생을 성실하게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한 몽테뉴가 주변에 이런 사람을 봤다면 분명 그 누구보다 신랄하게 나노 단위로 이 구제불능하게 딱한 이의 의식의 흐름을 분초로 쪼개서 보여줬을까? 그럼 조금이라도 뜨끔했으려나?
    그러다 또 상상이 옆길로 세면, 만약을 생각해 본다. 정말 만약 그토록 순진한 듯 재미있는 사람의 친구로 살았다면, 몽테뉴의 꽉 찬 서재를 수시로 드나들며 책을 빌렸다 안 돌려줘 보면서 그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으면 재밌었겠다. 그때는 얼굴에 수염도 나고 키도 천장에 닿을 만큼 크고 다재다능해서 물론 기억력도 좋으며 운동도 잘 하고 또...
    | 그가 발끈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았으면 재밌었겠다
    아니, 그래도 그 몇 백 년 전에 살았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어쩌다 그가 아무리 고의가 아니라도 그렇게 책 주는 걸 까먹거나 아애 잃어버리면 어떡하냐고 핀잔을 주면 스스로 너그러워서 이런 일쯤은 별일 아니야. 다들 그러고 살지 않냐고 그에게 되물었을 것 같다. 아니면 거기서 더 나가서 자네는 소심하게 오직 자신만 보는 글에 적어두는 추한 모습이 있지? 그걸 지금 다 빼놓고 내게 훈계하는 거냐고 따졌을지도. 그랬다가 우정의 완성 대신, 그 얄팍한 습관 탓에 조기에 관계가 끝이 났을 것도 같다.
    아무리 인생이 그토록 불규칙하고 비이성적이며 비효율적인, 태반이 버리는 시간들로 채워져 찰나의 섬광 같은 순간들을 사랑해야 하는 기이한 곡예라지만, 이런 상태로도 도저히 줄 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 할 것 같다. 이것은 그야말로 불규칙성을 넘어 뒤죽박죽 요절복통의 아수라장이 아닌가?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또 며칠만 지나면 태연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ㅊ을 까먹는단 말인가? 이 정도면 그 오랜 시간 동안 퍽이나 정이 들어 증오하면서도 연민하여 그 곁을 떠날 수 없는 그런 전쟁 같은 사랑이다.
    | 지극히 소모적인 습관에 시간을 도둑맞던 순간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마 다시 살아도, 그 어떤 습관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반복된 행동으로부터 스며든 기질 또한 그 전과 후로 같겠지. 대체 이런 걸 한결같다고 칭찬해 줄 수도 없는 일인데, 참으로 난감하다. 역시나 새해의 시작은 이런 당혹감에서부터 시작하는 건가? 당황하고 잠시 적응하다 다시 당황하고, 당황하고...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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