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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Ep.01 在漢陽都城的巡城道上遇見了我的母親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Ep.01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만난
    나의 어머니

    2016년 9월 13일 연재

    매일같이 비슷한 시간들이 지나간다. 때론 그렇게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또 위안이 되는 일상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평소에 걷던 길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맛을 기억할 때 미각에 의존하는 것처럼 기억 또한 평소에 머물던 공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매일 습관처럼 지나치던 집으로 가는 길. 그 골목에 들어선 작은 가게, 버스 정류장, 공원에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풍경은 마음속 깊이 새겨진다. 그렇게 일상에 자리한 크고 작은 기억들은 그 길, 틈 사이사이 각인된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기억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제는 도심 속 정형화되고 일렬로 제단 된 길 위에서 작은 틈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어느새 길은 그냥 길로, 일상의 행로 중 가장 빠르게 지나치는 존재가 됐다. 그러니 천천히 가만히 길을 걷는 일은 숨 쉬는 일처럼 중요하다. 그렇게 온전한 시간을 누려서, 진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다시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이제는 숨 쉬듯 천천히 걷던 때가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왠지 서글퍼진다. 문득 이대로 시간여행을 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렇게 다른 시공간으로 갈 수만 있다면,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간절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꿈꾸게 된다. 그러면 어김없이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던 그 길을 떠올리게 된다. 오래전 가졌었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집으로 가는 길. 당연하고 평범했지만 사실은 특별했던 동행. 키가 어머니 무릎에 닿았던 작은 시절, 어머니 보폭에 맞춰 뛰듯 걸었던 그 길.

    그 옛날, 이 순성이 낸 길과 함께 호흡하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순성길엔 어쩔 수없이 항상 누군가의 어머니가 있다. 그때도 집안에서 가장 바빴을 사람, 어머니. 그날도 어김없이 온 집안 식구들의 새하얀 옷을 입힐 준비를 했겠다. 어머니는 머리에 빨랫감을 이고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의 손을 꼭 잡고 마을 냇가로 향한다.

    이간수문(二間水門). 을지로 6가 18번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복원되어 남아있다.

    키가 어머니 무릎에 닿았던 작은 시절, 어머니 보폭에 맞춰 뛰듯 걸었던 그 길.

    한양도성의 내사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산의 능선을 따라 흐르고 흘러, 다시 한양도성의 이간수문을 통해 들어온 물길 어디든 자리를 잡는 어머니들. 아이들은 곁에서 물장구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빨래방망이를 두드려 때를 뺀다. 그러면 얼마 안 가 어깨부터 팔까지 쉬지 않고 내려오는 통증. 그래도 쉼 없이 더 복닥복닥 이야기꽃을 피우며, 흰 무명옷을 더 희게 만들던 여인들. 우리들의 어머니.

    반나절의 시간이 지나 자기 몸체만 한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는 너무 신나게 놀아 두 볼이 빨갛게 익어 집으로 가는 길. 사실 이대로 일이 끝날 리 없다. 다시 다려 주름을 펴고, 햇볕에 말리고, 단정하게 접어놔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잔뜩 배가 고파 세상 모든 먹거리의 이름을 조잘거리는 아이, 그 곁을 천천히 걸으며 그 이름 하나하나 자세히 들어주던 사람. 그 모든 어머니들이 아이와 함께 걸었던 길. 처음부터 그 길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오간수문 (五間水門). 동대문에서 중구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이다.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게 한다는 명목으로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리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하였다가 후에 그 위의 성곽이 훼손되면서 함께 없어졌다. 지금은 같은 자리에 오간수교가 복원되어 세워져 있다.

    한양도성을 걸으며 그 흔적들을 만나며 나는 왜 어머니를 떠올렸을까.

    서울 도심 속 하천, 청계천의 다리마다 남아있는 빨래터의 흔적들. 한양도성이 끊어진 듯 이어지는 청계천은 옛 서울 사람들의 놀이터이자 빨래터였다. 백악산의 백운동천으로 시작해, 동대문 오간수문을 통해 빠져나가던 내천이 한양도성과 함께 간직해 온 우리들의 이야기. 그 지워진 길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몰려온다.

    아마 또 다른 어머니도 고단했을 것이다. 앉아만 있어도 땀이 한 바가지던 어느 여름날, 갓난아이 막내와 놀아주다 큰 아이가 그만 잠이 든다. 그새 더위에 지칠까 부채질을 해주던 어머니. 그러다 그녀 자신도 어느새 선잠에 든다. 그 고요하고 따듯한 품으로, 그 이후로도 오래오래 아이의 시간을 감싸 안아주던 사람, 어머니...

    그 작은 포옹만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어떤 불안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순수한 시간.

    나의 잊었던 혹은 잃어버렸던 시간을 순성이 낸 길을 따라 기억해 본다. 골목골목 어떤 이야기가 남아있는 길, 북적북적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이 스며든 길, 언제고 편하게 찾아가 천천히 걷는 길, 그런 살아 숨 쉬는 공간이 주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그립다.

    어떤 목적 없이 걷다가 잠시 멈춰 서 그 길 속에 담긴 풍부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래서 쉬지 않고 달려온 일상에서 나만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쉼표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잠시라도 쉴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토록 아름다운 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양도성은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여전히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누구나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던 한양도성. 성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시간의 풍요를 상상하며 기꺼이 내 것으로 누려본다.

    산에서 산으로 냇물 흐르듯 능선 따라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성벽 곁에 모인 정다운 마을. 그 길에선 특별히 무언가 하지 않아도 그날 하루가 뿌듯해지던 기억.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나의 어머니. 너무도 익숙해 무심히, 당연하듯 살았던 한양도성 안에서, 그 모습을 너무도 닮아있었던 나의 어머니.

    한양도성은 '어머니'이다.

    처음부터 늘 내 곁에 있었지만 빠른 일상 속에 보이지 않았던, 느림으로 바라보니 보이는 얼굴.

    겹겹이 쌓아낸 영겁의 시간 속에서 만나, 서로의 무게를 버티어 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도 밀어내지 않고, 때로는 모진 비바람에 깎이고 깨어져도 모난 돌이라고 타박하지 않고 품어주던 얼굴.

    내가 굳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내가 애써 노력하지 않았는데...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되어주고, 나를 나로서 가치 있게 빛내주는...

    당신은 나의 어머니.
    by 김남길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영상은
    김남길과 시민 9명이 한양도성을 걸으며 직접 촬영,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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