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드는 문화유산, 한양도성 10화 김남길, 인왕산을 2016년 10월 27일 연재
행촌동 사직 근린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그저 파란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인 여장 아래로 한양도성 순성을 시작합니다.
인왕산 구간 중에 사직 근린공원 부근의 성곽은 성의 안과 밖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구간이라고 합니다. 지금 성안을 걷고 있으니 인왕산 입구에 가서는 성 바깥 오솔길로 걸어보기로 합니다. 이제는 느긋하게 하늘 위에 붕 떠 있는 듯한 인왕산 정상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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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코앞으로 듬직한 바위 봉우리가 보이네요. 인왕산에는 유독 바위들이 많다는데, 그 이름들이 제법 특이합니다. 선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그렇게 별별 생각을 하며 머릿속으로 그 모든 돌들의 모양을 직접 빚어보다 보면 다시 인왕산 공원 입구, 탐방로가 시작하는 지점에 다다릅니다.
한양도성 탐방로 '외곽 길'이라 표시된 나무 표지판을 따라 성 밖으로 걷습니다. 어느새 뒤돌아보면 지금까지 지나온 유려한 성벽이 한눈에 보입니다. 곡선을 그리며 남산 쪽으로 휘어진 성벽 안으로 촘촘히 마을 지붕들이 앙증맞게 놓여 있습니다. 그 뒤로 훤하게 솟아 있는 N서울타워도 보이는군요.
이제는 한양도성과 함께 아늑하게 둥지를 튼 도시의 풍광을 산수화 보듯이 지켜보며, 이제는 친근하다 못해 익숙한 각기 다른 모양의 성돌을 세어보며 계단을 오릅니다.
시작부터 경사가 높은 계단이 걱정이었는데 어느새 계단 대신 신발 밑으로 평평한 흙길이 느껴집니다. 숲 속을 가볍게 산책하듯이 길 위에 깔아둔 까끌까끌한 짚 길을 천천히 밟으며 성벽 곁을 걷습니다. "
새삼 서울이 숨겨 둔 정원에 온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는 마을버스가 올라오는 행촌동 마을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숲 속 한가운데 한가롭게 서 있다니, 뭐 이제는 한양도성이 바꿔버리는 이런 공간의 마법에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매번 신기합니다.
보고 또 봐도 남산 한가운데로 구불구불 흘러가는 한양도성과 그 좌우로 서울의 풍경이 두 눈 가득히 벅차게 차오릅니다. 그만 그 풍경에 취해서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모여든 다른 사람들도 한참을 이 아래 세상을 내다봅니다.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닿아있는 이 바위산과 초록빛을 감싸 안은 한양도성이 고마워집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바위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앞을 똑바로 보고 천천히 미끄러지지 않게 올라오세요.
걷다가 중간중간 서서 풍경을 바라봅니다. 전망대에 있을 때보다 이곳에서 저 멀리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 일대, 옛 육조거리까지 한 번에 보입니다. 발길을 멈춘 곳마다 드러나는 산맥과 도시의 모습이 일품입니다.
N서울타워가 시계탑처럼 솟아 있는 남산까지 내려가는 성곽을 중간에 두고, 주위에 북한산, 북악산, 관악산, 한강 모두가 한데 모여 조화를 이룹니다. 과연 서울이 천하의 명당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풍광에 넋을 놓고 있기에는 길이 험하니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는 길 내내 바위 사이에 틈들이 많이 보입니다. 작지만 옹골찬 골짜기와 성벽의 흐름 따라 내려와 보면, 어느새 내리막길이 나옵니다. "
여장의 총안 안으로 울긋불긋 솟아 있는 주택의 지붕들이 보입니다. 이제는 땅 밑으로 가까이 내려가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곧 숲길이 끝나고 도로가 나옵니다.
인왕산 순성길이 끝나는 초입에는 왼쪽 청운 공원, 오른쪽 사직공원을 가리키는 나무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그렇게 표지판 앞에서 아스팔트 길 위에 도착하면, 청운 공원 쪽으로 걸어가세요. 서너 발자국 앞으로 한양도성 창의문까지 800m 앞이라는 표지판도 보이네요. 이대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신나게 내려갑니다.
그렇게 부담 없이 인도 아래를 걷다가, 수성동 계곡으로 갈 수 있다고 알리는 표지판을 만나면 윤동주 문학관으로 직진합니다. 이대로 산책로를 걸으면 정면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보이고, 옆길에는 청운 문학도서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그만 그 화살표대로 내려가 한옥으로 지어진 청운 문학도서관에서 책도 빌려 부암동으로 내려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창의문을 먼저 찾아야 하니 윤동주 문학관으로 걸어갑니다. 새하얀 건물 외벽에 윤동주 문학관이란 글씨가 선명합니다. 그 밑으로 어린 시인의 얼굴이 점묘법으로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만 같은 물방울처럼 표현되어있습니다.
그 곁으로 윤동주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내를 건너 숲으로 다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그가 이 근방의 서촌에서 하숙방까지 가려고 건너던 모든 골짜기와 작은 골목길들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 부암동 언덕을 넘어 서촌으로 가면,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서너 달을 지냈던 누상동 하숙집이 있었습니다.
그의 절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의 증언에 의하면, 그곳에 살던 5월 그믐 무렵부터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그의 일과는 단순하지만, 꽤 알찼다고 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하고 산골짜기 아무 데서나 세수를 합니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가 수업을 마치면 전차를 타고 충무로의 고서점을 순례하고 명동이나 을지로를 거쳐 다시 청계천 주위 헌책방에 들릅니다. 그리고 하숙집으로 다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 당시 산맥 중간중간에 솟아 있는 초소 건물이나 전봇대 전깃줄로 시야가 막히지 않은 지금보다 더 단출하고 고즈넉한 인왕산의 도성 길을 걸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대로 창의문을 지나 서촌 하숙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창의문으로 갔을까요? 물론 지금과는 길이 많이 달랐겠지만, 이 지점에서 매우 가까이 성문이 있습니다. 여기서 길을 건너면 눈에 익은 표지판이 보입니다. 한양도성 순성길 표지판이 창의문 100m 앞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 창의문에 도착했습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일본 강점기 때도 헐리지 않고 원형 그대로 남은 문 이라더니, 실제로 보니 그 주위 풍경마저 단단하게 감싸 안고 있습니다. "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렸는데, 이미 조선 초기에 축조되었으나,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해석 때문에 오랜 기간 일반 출입은 금지되었습니다.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조용한 문이 큰 사건으로 소란스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조반정 때, 반란군들이 이 문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설이 분분하지만, 왕위에 오른 인조가 이때 거사에 협조한 문밖 백성들을 위해 능금, 자두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때 서울의 특산품이었던 ‘경림금(京林檎)’이 바로 창의문 밖 능금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창의문 정면으로 난 작은 터널을 지나 부암동으로 나옵니다. 이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1020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에 갈 수도, 부암동의 작은 미술관과 카페에 들렸다 겸재 정선이 자주 갔다는 수성동 계곡에 들러 보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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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하나하나의 성곽 길에서 받았던 감정들이 선명합니다. 다만 더는 그동안 지나온 행로가 자세히 생각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려지는 것이 각인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지금 지난 길들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만큼 마음으로 그리며 걸어왔으니까요.
이 성곽 도시의 기억이, 이미 오래전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의 그 모든 시간이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시공간과 함께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 말입니다.
이제는 성곽 도시의 모습을 다만 상상하고 짐작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느끼고 동감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 작은 여행으로 나 자신의 시간의 빛깔이 좀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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