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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나길 2기 '여기 있어요'
"오늘은, 제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소개합니다."
저는 연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필입니다. 흑연으로 만들어졌고요, 잘 지워지고 가끔 번지기도 하죠. 눈에 잘 띄진 않지만, 마음을 기록하거나 기억을 담아내는 일을 꽤 오래 해왔습니다.
![]() 언젠가부터 저를 유난히 아끼고, 자주 찾아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름은 김성수. 동인천 화수동의 오래된 골목을 다니며, 그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고 그려내는 작가입니다. 저는 성수씨의 손 끝에서 수많은 장면을 함께해 왔고, 지금도 그와 함께 동네를 기록하고 있어요. 김성수는 누구인가요?
성수씨는 보호시설에서 퇴소한 후, 동인천이라는 오래된 동네에 처음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동네’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느꼈다고해요. 이웃, 마당, 문 앞의 풍경. 그 낯설면서도 따뜻한 일상은 그의 그림에 오롯이 스며들기 시작했죠.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었던 것들
성수씨가 처음 저를 꺼낸건 사진을 배우던 시기였어요. 흑백 필름 카메라로 찍은 동네 풍경엔 쓸쓸함이 묻어 있었고, 그는 그 쓸쓸함을 조금 다른 감정으로 바꾸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저를 꺼냈죠.
![]() ![]()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어.”
그 말과 함께 흑백의 풍경을 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기름집, 문 앞에 앉은 노인, 골목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진의 정적은 그의 손을 거치며 따뜻한 감정으로 바뀌어갔고, 저는 그 모든 장면을 종이 위에 함께 남겼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사진과 손끝으로 옮긴 선 사이에 스며든 온기에 그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문 앞에 앉은 사람들
성수씨의 그림 속엔 유독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어요. 문 앞이나 계단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
왜일까요? 그건 그의 오래된 기억 때문이에요. 어릴 적, 성수씨는 형과 함께 삼촌을 기다리며 마당에 한참을 앉아 있었대요.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이죠. 하지만 그 시간은 외로움보다 함께 앉아 있던 온기가 더 선명하게 남았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 속 ’기다림’은 슬프지 않습니다. 오히려 따뜻하고 다정하죠. ![]() ![]() 완성보다 중요한 것
성수씨는 한 번에 그림을 끝내지 않습니다. 자주 지우고, 다시 그리고, 종이가 얇아질 때까지 그립니다. 저로 그린 선들은 번지고, 사라지고, 흔적만 남기도 해요.
하지만 그는 그 흔적을 좋아합니다. “완성만을 바라보다가 지워진 종이를 보니, 그 자국이 더 좋았던 적도 있었어. 내가 놓친 순간들이 그 안에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의 그는 완성보다는 과정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덜 정돈된 선도, 지워진 자국도 그의 진심이 담긴 흔적이라고 믿어요. ![]() 노란색 하나
성수씨의 그림은 대부분 흑백이에요. 저, 연필로 그리니까요. 하지만 그 속에 작고 조심스럽게 노란색을 얹습니다. 창문 안 불빛, 식탁 위의 조명, 전신주의 가로등 처럼요.
![]()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 아무리 낡고 어두운 동네라도, 불빛이 있는 곳은 누군가 살아가는 자리니까.”
성수씨가 꿈꾸는 삶, 그 안에는 늘 누군가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장면이 있습니다. 혼자 식판을 들고 밥을 먹던 시절, 그가 오래도록 상상했던 장면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의 노란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삶의 소망이고, 다정함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어요
’함께나길 2기’의 주제는 ’여기 있어요’입니다. 성수씨는 말합니다.
“그 말은 제 그림 전부를 설명해요. 여기에 누군가가 살았다는 걸, 저도 여기에 있었다는 걸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골목을 걷고, 저를 쥐고, 또 한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이 곧 그가 이 동네를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이니까요. ![]() 제가 본 성수씨는요
저는 말이 없지만, 오랫동안 그를 지켜봤습니다.
성수씨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감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완벽을 바라기보다 진심을 담으려는 사람이고, 받은 사랑을 다시 건네주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용기 내어 그려내는 사람입니다. ![]() 오늘도 그는 저를 집어 듭니다. 어떤 장면을 그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안에 누군가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그림에 담길 거라는 것. 저는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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