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Ep.09 김남길, 멈춰 서지 않았던 2016년 11월 8일
흙길 위에 딛는 두 발로 모든 길이 이어지던 때, 겸재 정선은 조선팔도를 유랑하며 산봉우리를 넘어 들과 냇가에 비친 하늘을 담는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그리고 한양도성은 그의 그림 곳곳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랑한 수려한 자연의 모습은 그 어떤 위화감 없이 성벽을 통해 이어진다. 마치 눈 안에 담기는 첫 풍경의 설렘을 단단히 담아두듯 건재해 산의 능선과 냇물, 땅과 하늘 속에 흐르는 그만의 리듬을 담아낸다.
그에게 한양도성을 그리는 일은 곧 산수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비록 화폭에 담길 수 있는 길은 어느 한 구역에 한정되지만, 한양도성을 그려 놓은 그의 그림은 양옆으로 이어질 성벽과 성문, 그 홍예 안으로 들어가면 보일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 풍경에서 병풍처럼 등장하는 한양도성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스스로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리고 그 스스로 길을 확장시킨다.
바퀴가 달린 탈것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길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나 그 근방만을 잠시 잠깐 오가며 살았다. 그 제한적인 이동 반경 안에서 풍요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여행자들이 전해오는 이야기를 통해서였지 않았을까.
평생 동안 팔도 승경을 찾아 끊임없이 여행한 겸재 정선의 이야기
사방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갈 때, 허리 한번 펼 짬 없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지붕 아래로 식구들이 돌아온다. 어느새 초롱불 하나 켜 놓고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옹기종기 한 방에 모이면 샘솟던 바로 그 이야기들...
친한 지기가 혹은 친척이, 아니면 옆집 건너 아는 사람이 마을 밖을 벗어나 변화무쌍한 산세와 날씨를 헤치고 골짜기 사이 숲길을 건넜다.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뜨면, 골짜기 틈 사이에 몸을 욱여넣는데, 마침 그 일대 진을 치고 있던 포수를 만나 산토끼 고기도 얻어먹고, 그이가 말해주는 건넛마을 이야기도 전해 듣는다.
그러다 어느새 이야기는 저 멀리까지 퍼져 각종 전설과 조선팔도의 소문들로 가지를 뻗어가다 두 사람 모두 잠이 든다. 그리고 해가 뜨면, 부지런히 길을 나선다. 그러다 인심 후한 어느 농부의 집에 묵게 되고, 주인이 차린 밥상에서 그 고을에 사또까지 줄행랑치게 한 귀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고, 모두 지어낸 장난이라 호언장담했는데 괜히 집주인이 차려준 밥상머리 앞에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길 수가 없다. 사내대장부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영 찜찜하기를 며칠. 이제는 그만 다시 한양도성으로 길을 나설 시간이다. 장승 앞으로 배웅 나온 주인 집 아이는 과거시험을 보고 오는 길에 다시 들려, 순성장거 이야기 꼭 들려 달라 눈을 반짝이며 그의 옷깃을 붙잡는다.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왠지 섭섭해 정답게 아이 손을 잡아줬다. 이번 순성장거 때는 한양도성의 세세한 풍경을 이야기해줄 거라고 약속한다
그렇게 한양까지 가는 길, 많은 양반들이 전답을 팔고서 수년을 공부해도 하늘에 별 따기로 어려웠던 과거시험을 보러 당대 수많은 청운들이 넘고 넘어 한양으로 가던 길.
그토록 굽이굽이 산 건너 물 건너 그 먼 미지의 곳으로 자신만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갔을 한양도성의 모든 여객들을 생각해 본다. 길을 가는 동안 각자의 사연에 더 얹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싣고 가다 보면 저 멀리 보이는 한양도성의 성문 앞에서 절로 환호 했을 것 같다.
그때는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 그 일대를 순찰하는 순라군이라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도 하고, 그간의 고생한 사연을 하소연했을 것이다. 드디어 한양을 코앞에 두었다는 감격, 그 환희의 순간, 바로 그때 솟아났을 감흥을 가지고 순성을 시작했을 것이다. 모든 염원을 담아 정성껏 걸었을 순성의 길
터만 남은 성문에서, 그리고 성문은 남아있지만 도심 한가운데 갇힌 듯 쓸쓸한 풍경 앞에서 힘껏 상상하며 나름의 옛날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담배를 문 호랑이가 천천히 이야기해주듯이, 한양도성에 가기까지 거쳐 갔을 모든 길의 행로를 이야기에 담아 마음 안에 써 내려간다.
그렇게 나만의 한양도성 이야기를 꾸미면서 과거에 이곳을 거쳐 갔을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느껴본다. 마치 지금 내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말이다.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는 한양도성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가고 싶다고 그 누구나 쉽게 닿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한양도성 안에 살던 사람들도 그 근방이라 할 수 있는 성저십리까지 가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고 하니... 그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미리 짐작할 수조차 없는 그 멀고 험한 길을 돌고 돌아 한양도성의 성문 근처임을 알리는 순라군을 만났을 때, 성문 홍예 안을 통과할 때는 기뻤을 것이다. 성문 사이로 열리는 성 안의 길. 한양의 풍경도 신기했을 것이다.
그때는 자칫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놓치면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지금이야 창의문 안내소 구간의 계절별 개방 시간만 주의하면 한양도성을 드나듦이 자유롭지 않은가. 대려 그 당대 사람들보다 한양도성의 야경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다행이다.
담을 넘지 않고도 성벽에 비치는 별 밤 풍경을 한없이 볼 수 있다. 그때보다 풍경이 불완전하고 한양도성 위로 펼쳐진 수많은 별 하나하나를 세어보기는 어려워도, 그대로 새로운 멋을 보여주는 한양도성을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나름 유리한 면은 있다
그러니 아직 거기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밤이 새도록 한양도성에게 말을 건네보고 싶다. 세상 그 어디를 여행해도 한양도성만큼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마음껏 자주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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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길
"아래 소개하는 영상은
<길스토리: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프로젝트>의 시민 참여자 '박 권'씨가 직접 촬영한 영상으로 '흐름'을 주제로 제작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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