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Ep.04 김남길, 지금 당신이 2016년 10월 4일
끊어졌다 이어지고 어느 순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한양도성의 길을 걷고 있자면, 이 길이 우리네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길을 걷고 있자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들이 마음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그렇게 가만히 성벽을 보고 있으면 그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지금 걷는 이 길은 어떤 길인가
이름 모를 누군가가 오늘도 내일도 또 그다음에도 걸어가던 길. 그런 길 위에 서 있으면 때론 먼 과거의 누군가와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것만 같아 아련하다.
그 사람, 그날 하루는 어땠을까? 평소와 다름없어서 지루하고도 평범한 날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 마음이 번잡했나, 어느 날은 솜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이다가도 어느 날은 두텁고 우중충한 발소리를 냈겠지 싶은 그런 생각. 그렇게 그 시간을 상상해 본다.
순성놀이하듯이 처음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 그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다채로운 순간, 기억들. 조금만 더 천천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곳에 남은 기억의 잔향들이 말을 건네온다. 조금만 더 꼼지락거릴라 치면 누군가 바로 옆에서 호통을 치는 듯이 말이다.
금일은 순성하세 거참, 그냥 좀 나오게나 오늘 하루는 다른 일이란 제쳐두고 두루두루 구경하자고
조선팔도가 꽃빛으로 물들어 화전놀이를 하던 때, 봄 마실 겸 서당에서 스승을 앞세워 아이들이 줄줄이 뒤를 따라나서던 순성길.
기약이란 없을 것 같은 과거 급제의 염원을 담은 앳된 얼굴의 유생들과 이번 길도 무탈하게 오고 가기를 염원하는 보부상, 풍작을 기원하는 농부들... 그 모두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이어지던 한없이 진중하면서도 또 들뜬 걸음들로 다져졌을 순성길.
그때는 오직 성곽이 낸 길을 따라가도 길을 잃는 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양도성의 끊어진 성곽과 남은 흔적을 찾아서 걸어야만 한다. 자칫하다가 도심 한복판에서 성곽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옛길은 끊긴지 오래다
그렇다. 이미 그 시절의 옛길은 끊긴지 오래다. 물길의 흐름처럼 끊긴데 없이 끝없이 이어지던 그 유려한 길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온전한 한양도성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약 한양도성의 온전한 모습이라는 것이 원형이 보존되었던 성곽도시 그 자체라면, 우리는 이미 잃어버렸고, 다시 되찾을 수도 없다. 이제 와 도로가 뚫리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선 곳에 성벽을 무조건 다시 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설사 많은 시간을 들여 다시 쌓는데도, 과연 그 길이 본래의 그 길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양도성이 그대로 보존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지금도 숲 속 깊숙이 자리해 옛 모습이 비교적 온전히 남은 구간이 있다. 하지만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성문과 성문 사이가 단절된 채로 성문 양옆의 성벽은 당연하게도 끊겨있다. 그러니 무심히 지나치던 도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옛 성문이 매우 뜬금없이 보이기도 한다.
대개 성문인지도 모른 채 지나치기 쉽다. 실제 한양도성 탐방을 다녀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성벽인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 덕에 성벽이 이어져있던 본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지만, 현대식 건물과 도로에 떠밀려 방치된 듯 남아있는 성벽을 보자면 그나마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야 할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이미 오래전부터 한양도성은 헐려왔다. 전차 노선이 깔리면서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주변의 한양도성이 헐리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 때 도시계획을 명목으로 성곽의 여기저기가 헐렸다. 이후에는 급격한 도시화의 진행으로 성곽이 심지어 건물의 담장으로 사용되거나 파손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모든 희로애락을 품었던 한양도성의 길은 그토록 오랫동안 스러져왔다. 과연 언제까지 이 길을 걸으며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순성을 걸으며 얻는 기쁨만큼이나 크고 깊다.
하지만 한번 그 길을 걸으면 이미 정이 들어서 다시 찾지 않을 수 없는 길, 그 순성이 낸 길을 따라 걷고 있으면 일상 속에 숨죽여 있던 감정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 얼마나 더 한양도성이 이어지다 또 끊어질까 염려하고 또 실망하기도 하던 때, 다시금 잊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문의 모습에 온몸이 자유로워지는 듯 후련해지던 순간, 어느새 보이지 않는 길을 찾고 마음의 창에 그 길을 그리는 이 순성놀이를 즐기게 되는 순간, 한양도성은 이미 그 하나의 마음속에 복원되어 생생히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그 행로 안에 담긴 모든 희로애락
결국 아직 우리가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건, 이 길을 걸을 거라는 건, 그리고 지금 한양도성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건 이미 한양도성의 온전한 복원이 시작된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사라진 성벽의 흔적과 지워진 그 모든 옛길들을 어떻게 걷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누군가 정해준 행로대로 가지 않고, 스스로 찾고 질문하고, 함께 이야기하며 사라진 한양도성을 찾아주기를 바란다.
한양도성의 어떤 풍경 앞에 멈춰 서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다시 지금을 우리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한양도성과 여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지금을 말이다.
by 김남길
"아래 소개하는 영상은
<길스토리: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프로젝트>의 시민 참여자 '김연중'씨가 직접 촬영한 영상으로 '한양도성의 희로애락'을 주제로 제작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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