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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세상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Hwashin Son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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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의 기적
    name : 손화신    date : 2016-12-01 19:30:31
    추천수 31
    조회수   787
    크리스마스의 기적
    글 : 손화신 (작가)

    몇 해 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날도 나는 2평 남짓한 기상청 골방에 혼자 있었다. 라디오 기상리포터로 일하던 때였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날, 3분의 방송을 위해 5시간을 창문도 없는 라디오 방송실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날따라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 일이 끝났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신대방역에 다다랐을 때 계단 아래 양말을 파는 리어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겨울양말도 필요했겠다, 나 자신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쥐어주지 않으면 더 쓸쓸할 것 같아 마음에 드는 양말 세 켤레를 골랐다.
    아주머니는 내가 양말을 다 고르기를 기다리셨다가 타이밍에 맞춰 검은 비닐봉지를 벌려주셨다. 나는 아무렇게나 고른 양말들을 봉지에 구겨 넣었다. 그런데 이어진 아주머니의 행동이 내 뒤통수를 쿵 내리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아무렇게나 넣은 양말 세 켤레를 비닐봉지에서 다시 꺼내셨다. 그리고는 한 켤레 한 켤레 예쁘게 다시 개켜서 봉지에 담으셨다. 마치 어머니가 식구들의 빨래를 개듯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심지어 아주머니는 봉지를 다시 건네며 환한 미소까지 덤으로 얹어주셨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기 오기 직전, 나는 따뜻한 라디오실에 앉아서 담요를 덮고 왜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뭐가 그리 불만이었을까?
    이 ‘사건’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내가 나의 일을 사랑하고 마음을 담으면 그 일이 곧 위대한 일이 된다는 걸 아주머니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아주머니도 크리스마스이브 같이 좋은 날 토끼 같은 자식들과 따뜻한 방에 배 깔고 누워 맛있는 거 먹고 쉬고 싶었을 테다. 햇빛도 안 비치는 지하철역 아래서 종일 계셨을 아주머니의 표정이 그렇게 밝았다는 사실도 돌이켜보니 새삼 놀라웠다. 아주머니는 일할 수 있는 행복,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기쁨 삼아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보내고 계셨던 걸까?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단 걸 그날 알게 됐다. “자신의 일을 소중히 하라”는 말은 초, 중, 고등학교 도덕 시간 내내 들었고 책에서도 읽었으며 TV 강연에서도 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어카 아주머니의 행동 하나만큼의 힘도 내게 발휘하지 못했다. 아주머니의 작은 행동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양말이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자신이 파는 물건이 사는 사람의 품에 안기는 순간까지 곱게 전해지길 바라며 끝까지 매만지던 아주머니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후로 나의 57분 기상정보는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전파를 탔다.

     

    _손화신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다. 스피치 모임을 10년 동안 진행해오며, 진정한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말의 뿌리인 침묵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키워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현직 음악담당 기자이며, 길스토리 프로보노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브런치 주소: brunch.co.kr/@iheary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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