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S OF LIFE
글 : 이가영 (작가)
“하나의 죽음은 다른 죽음에 빛줄기조차 비추지 못한다.”
-E.M. Forster, Edward Morgan Forster (1879. 1.1~ 1970. 6. 7)
시간의 지층 그 사이사이,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산다. 다시 처음으로 시작한대도 차마 갚을 수 없는 영혼의 빚을. 아마 신의 축복을 몰아 받은 풍운아라 하면, 바로 그 빚이 최대한 많은 사람일 것이다.
물론 무거운 ‘빚’인 동시에 ‘찬란한 빛’인 그 모든 사랑은 제각각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너무나 다층적이고 섬세하게 곳곳에 흩어져 있기에 그 구체적인 모양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그 모든 빛들 중에서 유독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서로 비슷한 이야기에 때론 시시하다고 느끼지만 우리는 거듭 매혹된다. 그리고 가끔 제법 신선하게 정말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는 그리스 신화에 풍기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가끔 그 진위 여부에 대해 캐고 싶지만.)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끼친 영향이 너무나 막대해서, 때론 부모가 죽이 잘 맞던 형제가 어린 시절부터 뭐든지 함께했던 친구가 준 것보다, 더 깊고 은밀하게 서로의 시간을 공유한다. 그야말로 유별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하게 수십 년을 마치 샴쌍둥이처럼 하나의 몸에 두 영혼이 살듯이 함께한다. 이렇게 말 그대로 반려가 있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신의 편애를 받아 기적을 선물 받은 운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연인들은 드물지만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며, 참으로 끈기 있고도 진실하지만 그래서 종국엔 방금이라도 부서질 듯 여리고도 순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꼭 애잔하면서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마지막은 지켜보기가 고통스럽다.
상실 그 후, 그저 추락하고 또 추락한다. 서로가 단단히 이어져있었던 것만큼 둘 중 하나가 그 짝을 잃어 가지고 있던 날개가 부서진다. 너무나 쉽게 또 처절하게 산산조각이 난다. 가끔 시간에 힘을 빌려 잊을만하다가도, 다시금 생생히 가진 것을 박탈당한 그 순간이 되살아나 숨을 내쉬는 일조차 버겁다.
물론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이 으레 그래왔듯이, 이런 역경을 잘 극복해서 그 삶이 끝까지 명랑하다면 좋겠다. 또 세상이 그걸 요구한다. 하지만 다시는 마냥 명랑해질 수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다. 이제 세상은 그 날개를 잃는 순간 변했고, 더는 되돌릴 수가 없다. 그것은 애초에 삶에 죽음이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명백히 짜인 각본이다. 그토록 찬란한 사랑을 겪었던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사랑으로도 그 빈자리를 메꾸기가, 다시 채워졌다고 착각하기조차 힘들다.
심지어 노년에 만난 아이, 언젠가 분명 알고 있던 어린 자식의 모습을 내려받은 손자를, 그 작은 천사가 찾아와 갖은 사랑스러움을 보여주고 안아줘도. 좋은 친구와 함께 맛이 일품인 음식을 먹어도, 함께 놀며 웃어도 가슴 한편에서는 통증 같은 피로가 몰려온다. 그렇게 어김없이, 틀림없이 일정한 리듬을 타듯이 끝없이 쏟아지는 서리들이 혈관 안에서 흩어져 신경 하나하나에 박혀 이곳저곳이 아리다.
막상 처음에는 길길이 날뛰며 화도 내본다. 결국 그 사람은 사라졌고, 세상은 그 후로도 아무 문제없이 잘도 돌아가는데, 왜 여전히 세상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보여야 하는지 불공평하게도 느껴진다. 그렇게 점점 더 깊이 침전한다. 그러다 인정하고야 만다. 더 이상은 그전에 맛보았던 기적은 없을 거란 걸. 이젠 더 이상 높은 곳에서 그토록 선명하고 분명하게 세상을 볼 수가 없는 걸, 그때는 함께였으니까. 당신과 함께해서 잠시 마법을 경험했을 뿐이니까.
과연 무뎌질 수나 있을까? 이 잔인한 결말 안에서 차마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경솔하고 옹졸하대도, 용서받지 못할 실수라 해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지하 세계로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으러 내려간 오르페우스처럼. 그토록 그리웠던 사람을 뒤에 두고 앞서 걷던 그 남자처럼. 등 뒤에 들리는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게 될 것 같다. 그만 나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왜 이젠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지 불안해하면서. 여전히 당신, 내 등 뒤에 서 있는지.
대체 왜, 시간의 뿌리를 통째로 잃은 슬픔을 극복해야만 하는가? 끝내 훌훌 털어내고 강해져야만 하는가? 애초에 극복할 수도 없지만 이겨낼 생각도 없다. 그렇게 그 사람을 잃은 지 수년 뒤에야, 그제야 고백할 수 있었다. 스스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어떻게 삶은 그 전과같이 복원될 수 없는지를.
우리는 그런 거대한 상실을 온전히 이겨낼 만큼의 힘이 없다. 애초에 이는 인간의 의지와는 별개의 영역이다. 삶의 시작과 끝이 언제나 함께 존재했으되, 동시에 한 곳에 존재할 수는 없던 것처럼.
1979년. 줄리언 반스는 팻 카바노프와 결혼했고, 2008년 어떤 예고도 없이 그녀를 잃었다. 그 후로 5년 동안 이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껏 해왔던 대로 글을 쓴다. 그렇게 그 자신이 생생히 겪었던 이야기,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기적과 그 기적이 만들어낸 성취들은 고스란히 남았다.
하지만 그 상실의 고통을 영광의 상처라 부르기엔 그 흉터가 너무나 깊다. 독자는 그 고통의 맛과 온도를 그 글로나마 짐작할 뿐, 온전히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다만 그 부러움만은 생생히 남는다. 이 세상에 오직 둘만이 아는 내밀한 서사가 있던 삶은, 그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난 뒤에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 난다. 그래서 괜스레 이 모든 회환을 덮고 나서는 글쓴이를 걱정하게 된다. 그 하나의 세계를 잃고 난 사람은 과연 그 후로 온전히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작가는 거듭해서 머릿속을 떠돌던 자살에 대한 생각만은 단념했다고 고백한다. 이젠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은 자신마저 사라져버리면, 영영 이 세상에서 죽어버릴 테니까. 다만 그녀가 옆에서 항상 격려하고 사랑했던 새 책을 내는 일을 계속 해내가겠노라고…….
초반에는 ‘외톨이’로 전락했다며 혼자서 남은 시간들을 푸념했고, 또 자신은 무신론자이기에 내세에 다시 만날 상상도 할 수도 없다며 울적했지만, 결국 그는 이젠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가 함께 만들어준 자신의 모습을 지켜 냄으로서 그 존재 없이도 여전히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 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영원히 우리를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Julian Barnes | Julian Patrick Barnes (1946.1.19~)
_이가영은 끊임없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며, 명확하게 말하고, 섬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소설로 등단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