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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한양도성
      역사와 문화, 미래의 가치를 품고 있는 서울 한양도성에서
      우리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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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Ep.08 꼭꼭 숨어있는 한양도성을 찾아라

    우리가 만드는 문화유산, 한양도성 8화

    김남길, 꼭꼭 숨어있는
    한양도성을 찾아라

    2016년 10월 13일 연재

    지난 순성길에서 만났던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을 기억하시나요? 이번에는 숭례문 밖에 있던 연못 '남지' 표석 맞은편에 자리한 대한상공회의소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그 건물의 낮은 담장이 한양도성의 성벽이거든요. 그렇게 다시 성곽 따라 길 따라 숨겨진 성문, '소의문'을 찾아갑니다.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곁으로 온전하지 않지만, 성곽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성벽이 보입니다. 여장도 총안도 없이 야트막하게 그야말로 담장을 쌓아놓았습니다.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식이 붙어있지만, 한양도성임을 알리는 표식을 봤다고 해도 정말 성벽인지 실감이 안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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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인 듯
    성벽 아닌 듯
    성벽 있는 길

    그나마 성벽 안에 박힌 성돌도 새것이 대부분이라 한양도성의 유구한 시간을 느끼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게 길이 끝날 때 즈음, 맨 밑단에 드문드문 보이는 까무잡잡한 옛 돌 만이 이곳이 한양도성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도성을 온전히 복원해 놓았다기보다는 성벽이 지나가던 자리를 표시해주기 위한 성벽의 연결성을 표현한 조형물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한양도성의 흔적이 좀처럼 와 닿지 않아 실망스러움도 잠시, 어느새 이미 복원된 성벽은 끊겨 이미 저 먼발치에 있고 다시 평범한 빌딩 숲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제 이 길 그대로 조금만 올라가세요.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 건너편으로 경남은행 건물이 보이면, 그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섭니다. 그리고 바로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돌아서면, 못 보고 지나쳐도 이상할 것 없는 곳에 ‘소덕문 터’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습니다.

    '소의문'은 오늘날 서소문 고가도로의 시작점에 서 있었지만 1914년 일제가 철거하여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도에는 '소의문'이 아닌 '소의문 터'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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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덕문,
    소의문,
    서소문.

    소의문은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어 처음 이름은 '소덕문'이었다고 합니다. 영조 때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군요.

    실록을 보면, 1394년 2월 12일 서소문의 옹성이 무너지려 하자 감역관을 옹진으로 귀양 보내고, 사흘 뒤에는 석장이었던 중을 효수하여 문에 걸어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문을 허술하게 만들었다고 중의 머리를 베어 문에 매단 역사 때문일까요? 그 뒤로도 소의문 밖은 죄수들의 사형 장소로 자주 이용돼 '서소문은 참수장'이란 말이 퍼졌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들으니 이 자리에 서 있기가 좀 으스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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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길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순성길

    이제 대로변 한가운데 숨어 있던 소의문의 흔적도 찾았으니, 구한말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정동길로 이동합니다. 소의문 터 건너편의 SK 순화빌딩과 평안교회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건 또 처음 알았군요. 평안교회 초입에 이 일대의 옛 지명을 알리는 표석이 있습니다. 그 옛날 이곳 순화동 일대에는 숙박시설이 많고 수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해서 '수렛골'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품은 평안교회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 안 가 순성길 표지판이 보입니다. 한양도성 '돈의문 터' 850미터 앞. 그 뒤로는 '숭례문'이 1.1.km 남았음을 알려주는군요. 이대로 걷다 보면 막다른 길이 나와 당황할 수도 있으나 어김없이 순성 안내 표지판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안내문이 보이는 대로 곧바로 걸어서 들어갑니다. 그럼 작은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배재공원입니다. 빌딩 숲 속에 숨어있는 한적한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립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배재학당 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군요. '배재학당'이라고 하면 미국 선교사가 최초의 영어 교육기관으로 세운 학교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1895년에 독립협회가 태동하고 독립신문도 발간되었다는 건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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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
    또 다른 역사

    하나의 역사적 장소가 또 다른 당대 사건들과 중첩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하기야 지도도 지금의 지도와 옛 한양 지도를 겹쳐서 비교해 보며 길을 찾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표석 하나를 보더라도 한 장소에 동시에 존재했던 또 다른 사건에도 눈여겨봐야겠습니다. 그 속에 또 새로운 이야기가 숨어있을지 모르니까요.

    이제 공원 나무들 사이로 서울중앙지방법원 중부등기소가 보입니다. 그 옆으로는 서울 시립미술관도 있습니다. 이제는 안 보이면 섭섭할까 공원을 나오자마자 전봇대 위에 또 순성길 표지판이 붙어있습니다.

    한양도성 돈의문 터 앞으로 700M, 좌회전을 하라네요. 그렇게 도보를 얼마 걷지 않아 러시아 대사관과 정동교회가 나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정동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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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문물의 중심지,
    정동

    '정동'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가기 전에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 후 19세기 후반 개화기를 맞아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당시의 대표적 무역항이었던 마포와 궁궐에서 가까운 정동에 들어서면서 서구식 교육기관과 종교 건물이 모여들어 근대 문물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정동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이나 원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책방도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영사의 어린 자녀들도 머무는 경우가 있어 그 푸른 눈의 아이들도 이 근방의 조선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나라를 가졌지만, 함께 장난치고 놀았던 아이들을 상상하며 이화여고를 곁에 두고 걷습니다.

    당시 이 일대에 배재학당처럼 선교사들이 세운 서양 학교들이 많았는데, 이화여고의 전신인 이화학당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도 이곳의 학생이었는데, 이곳 유관순 기념관 안 박물관에는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던 이화학당 교실을 재현해 놓았다고 합니다.

    담벼락 안으로 유관순 열사의 동상도 보이네요. 담장 밖에서 보면 비록 뒷모습만 보이지만, 소녀의 어여쁜 댕기 머리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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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길 따라 한 걸음씩
    너와 함께

    가만 보니 이 옛길을 걷는 내내 과거와는 길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격변의 시기에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타국의 이방인들과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우리 학생들이 함께 공유한 길이니,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도 우리가 함께 빛을 향해 나아갔던 동감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걸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그때 길의 색이 바뀌고 이야기가 변하고 풍경이 다른, 그런 다채로운 정동길 이대로 이젠 아무 생각도 궁금한 것도 없이 정동 사거리까지 걸어 갑니다.

    그다음 성문인 돈의문 터가 그 일대에 있는데 이번 한양도성 길 찾기는 이만 접어두고, 정동길에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이어보며 다음 길을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습니다. 순성길은 혼자 걸을 때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 수다를 떨며 걸어도 좋은 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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