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토크
글 : 손화신 (작가)
미국의 한 회사에서 인턴생활을 했던 친구가 내게 스몰토크(small talk)에 대해 알려준 적이 있다. 미국인들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스몰토크란 날씨, TV 드라마, 스포츠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가볍게 나누는 걸 말한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도 대화의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아이스브레이킹(Ice breaking)을 위해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차원이 다르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단다. 가령 "제임스, 오늘 뭐 타고 왔어?" 라는 주제로 10분을 이야기하고 "제임스, 오늘 네가 신은 양말 색깔 예쁘다"로 20분을 이야기하는 식이란다.
내 친구는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에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사교성이 좋던 친구가 오죽하면 스몰토크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피해 다녔을까. 말 다했다. 친구는 특히 이런 점이 싫었단다. "오늘 비가 올까?"라고 물어보기에 성심성의껏 기상 예측안을 내놓으려는데 막상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냥 휙 가버린단다. 질문만 던지고선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했나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대답은 원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대답이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저렇게 껍데기 같은 말들을 늘어놓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말의 공해처럼 느껴졌다. 미국 사람들은 대화할 때 잠깐이라도 침묵이 흐르는 걸 못 견뎌 하나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친구가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에게 또 스몰토크를 걸어오더란다. "제임스, 오늘 경기에서 클리블랜드가 이길까?" 내 친구는 "글쎄, 잘 모르겠어요" 하고 성의 없이 답했다. 그러자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엘에이 다저스가 이길 것 같아. 왜냐하면 말이야..." 하면서 또 혼자 막 떠들었다. 그는 연이어 새로운 쓸데없는 질문들을 던졌고 친구의 반응이 미지근하자 떠들다가 가더란다.
그가 가자 친구는 옆에 앉은 동료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우리 회사 사장이잖아. 몰랐어?"
친구는 그때 비로소 미국인들이 왜 그토록 스몰토크에 열심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마주칠 때마다 소소한 이야기를 던지면서 마음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히려는 의도란 걸 직감한 것이다. 사장과 인턴이라는 권위의 벽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시시콜콜한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려는 배려이기도 했다. 친구는 그날 사장과의 대화 이후 스몰토크의 가치를 납득했고, 스몰토크의 맛에 제대로 빠졌다. 그 후 스몰토크 덕분에 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었다며 친구는 흐뭇하게 자랑하기도 했다.
스몰토크는 말 그대로 잡담이다. "날씨가 참 좋지요?" 하면 "날씨가 좋아서 주말에 어디라도 가야할까 봐요" 하고 맞장구치는 일상의 대화다. 하지만 이런 부담 없이 가벼운 소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두 사람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가까워질 수 있다. 무뚝뚝하게 서로를 모르는 척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에서, 복사기 앞에서 만날 때마다 스몰토크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존재를 '아는 척' 하는 것은 무엇보다 타인을 향한 ‘존중’인 것이다.
_손화신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다. 스피치 모임을 10년 동안 진행해오며, 진정한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말의 뿌리인 침묵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키워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현직 음악담당 기자이며, 길스토리 프로보노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브런치 주소: brunch.co.kr/@ihear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