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곳도 아닌 곳
사진·글 : 김형석 (포토그래퍼. www.ebonyandivory.co.kr)
가을이야말로 여행을 떠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아닐까 합니다. 건조한 날씨 덕에 쾌적한 기분이 하루 종일 이어지고, 시원한 바람과 저녁노을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얼마 전 우연히 카페에서 읽게 된 짧은 글이 생각납니다. 미국 산타바바라에서 작가로 활동 중인 피코 아이어는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여행지로 추천했습니다.
아무 곳도 아닌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비교적 인기가 덜한 지방 소도시로의 여행일까요? 아니면 늘 마주하는 거실의 소파일까요?
실수로 잘못 타버린 지하철 속의 나, 입장시간을 놓쳐버린 극장 앞의 나, 주말 저녁 친구와의 술자리 약속이 취소되어버려 갈 곳 잃은 나.
이보다 우울하고 쓸쓸해지는 시간이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 그 순간이 여러분께 주어진 여행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직업의 특성상 낯선 도시들을 방문할 때가 많습니다.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 늦춰지거나 생각보다 일찍 끝나게 되면 그 동네 가게들을 둘러봅니다. 편의점처럼 뻔한 가게들이지만 가게 인테리어라든가 사람들의 옷차림, 표정만 보아도 꽤 흥미롭습니다. 괜히 군것질거리를 하나 집어 드는데, 그 시간이 아깝지는 않습니다. 운이 좋으면 서점이나 소규모 책방을 만나 1-2시간을 머무르게 되기도 합니다.
결국 작가 피코 아이어는 매 순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추천했겠지요. 어릴 때 어른들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라고 했지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잔소리처럼만 들렸습니다. 저는 흰머리의 어른들 중 한 명이 된다면 그렇게 조언하지는 않을 참입니다. 그리고 피코 아이어의 이야기를 해줄 겁니다.
_김형석은 사진작가다. 일본 패션잡지에서 사진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에보니앤아이보리’ 스튜디오의 대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자크타티’와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며, 음악이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사진작가”이다. 길스토리 프로보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