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의 힘
글 : 손화신 (작가)
스피치 동호회에 오래 참석하면서 발견한 게 있다. 사람들은 멍석이 깔리면 평소보다 멋진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연단에 나가면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막상 거기에 자신의 진심을 담아내지 못해 스스로 수습이 힘든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멍석은 특별한 게 아니다.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을 멍석 위에서 해도 된다. 아니, 오히려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개인적이면 개인적일수록 그 이야기는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언젠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스피치를 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연사님들은 연단에 서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꺼내 놨다. '사랑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 내가 양보하겠단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 연륜에서 묻어나는 사랑에 대한 성찰들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달랐다. 사랑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고등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사랑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고도 사랑에 대한 가장 따뜻한 스피치를 했다. 아주 사소하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로.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요, 좋아했던 여자애가 있었거든요. 학원에서 딱 처음에 봤는데 한눈에 뿅 해가지고요, 친해지려고 막 장난도 치고 그랬어요. 매일 그 친구 옆 자리에 앉으려고 교실에 들어갈 때까지 몰래 기다렸다가 따라 들어가서 옆 자리에 앉았어요. 1, 2년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데 고백은 못했어요. 용기가 안나가지고요. 언젠가 정말 멋있게 고백하려고 마음만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애가 호주로 이민을 간다는 거예요. 저는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믿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그래서 '야, 뻥치고 있네~' 하면서 속으로 '설마. 아닐 거야. 장난일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정말 가버렸더라고요. 저는 그날 밤 혼자서 다음날 새벽까지 포도주스 1병을 마셨어요. 미성년자라 술은 못 마시니까요. 아직도 그 친구가 보고 싶고 꼭 다시 만나서 고백하고 싶어요.”
박수가 뜨겁게 터졌다. 남학생은 사랑이란 단어 한번 꺼내지 않았지만, 멋진 표현 하나 쓰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심이 담긴 호응을 얻었다. 특별할 줄 몰랐던 것. 꾸미지 못했던 것. 어른들에겐 모두 '결점'이라 불렸던 이런 단점들로 남학생은 가장 진솔하고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 말매무새가 깔끔하진 않았지만 그런 어눌한 말투마저 첫사랑의 풋풋함처럼 다정했다.
남학생을 보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발표는 '잘' 하거나 '멋있게' 하는 게 아니라 '진솔하게' 하는 것이란 걸. 사람들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가르침보다,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의 정의내림보다, '나는 그랬다'라는 말에 그저 '나도 그래'하고 공감하길 원한다는 것을. 사소한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공감의 힘이 깃들어있다.
_손화신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다. 스피치 모임을 10년 동안 진행해오며, 진정한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말의 뿌리인 침묵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키워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현직 음악담당 기자이며, 길스토리 프로보노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브런치 주소: brunch.co.kr/@ihear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