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Ep.10 김남길, 미래로 이어지는 2016년 11월 15일
옛날 옛적에 걷는 일 하나는 기가 막힌 소녀가 원주에 살았다. 하루 종일 마당 앞을 걸으면서, 한 손에 책을 들고 사서삼경을 줄줄 외던 비범한 소녀. 본래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해 집에만 있었는데, 아버지 서재의 책들을 한두 권씩 빼보는 재미로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는 했다.
책 속에 그려진 규방 밖 세상은 소녀 '금원'을 자유롭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사는 이 시골마을이 더욱 작게 느껴졌고, 집 밖 그 너머의 세상을 보고 싶다는 열망은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무엇보다 겸재 정선의 산수 화첩에 나오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 태백산맥으로부터 이어진 한양도성의 풍경을 마음속에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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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이라도 그 풍경 속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번 생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한양에서도 직접 가본 이가 드물다던 금강산의 절경과 사계절마다 그 모습이 다른 한양도성. 그 성 문안으로 들어서기 까지를 늘 상상했다.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나는 한양도성의 그 끝없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도성 한가운데로 흐르는 청계천을 따라 골목 곳곳을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상상. 만약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자신의 두발로 한양도성까지 걸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도 기어이 넘쳐흐르고 마는 꿈
결국, 그 오래된 꿈을 소녀는 실제로 이루어낸다. 자신이 사는 마을 밖을 벗어나는 일도 드물었던 그 시절, 이제 막 열네 살이 되던 춘삼월에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길을 나선다. 남장을 한 채로 제천 의림지를 거쳐 금강산, 관동팔경, 설악산 그리고 한양까지 가는 길. 그렇게 한양도성에 닿을 때까지 소녀는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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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많은 산맥을 넘고, 그 사이 골짜기 개울을 따라 거슬러 내려오고 올라오기를 반복하다 만났을 풍경들을... 소녀와 함께 여행 한 것처럼 그려본다.
마침내 그 온갖 고생 끝에 닿았을 한양도성의 성문 앞에서 소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만 감격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이 생각해 온 것보다 한양도성이라는 게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 실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뿌듯했을 수도... 오직 자신의 힘으로, 두발로 정직하게 성 밖을 두루 걸어서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왔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리고 이 호기심 많은 소녀는 성의 안과 밖으로 열리던 시장 구경을 놓쳤을 리가 없을 것이다. 시장이야말로 세상 만물이 모이는 별 천지가 아니던가. ![]()
책을 좋아하던 그 소녀는 청계천 광통교 주변에 자리한 책사(冊肆)와 세책점(貰冊店)도 둘러봤을 것이다. 이 한순간을 위해 지금껏 글을 배워 왔던 거라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계집아이가 글을 배우는 것처럼 헛된 일도 없다던 때였기에,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꿈들이 단지 미련으로 남아서 마음이 아플 날들이 더 많을 거란 걸 소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두발로 한양도성을 밟은 순간이 소녀의 삶에는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새 금원은 운종가 중심부인 종루로 간다. 한양도성에 다녀온 사람들이 말해왔던 시장 한가운데, 한양도성의 대문을 열고 닫는 때를 알려주는 큰 종.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서울 한가운데였다.
이제 종루 양옆으로 여섯 곳의 큰 상점인 육의전이 있으니 볼거리 먹을거리가 한가득일 테다. 그때부터는 마냥 휘파람을 불며 발길 가는 대로 순서 없이 이곳저곳 거리를 돌아다녔다. ![]()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매를 잡아끌어다 어느새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는 여리꾼들도 보인다. 공터에 돗자리를 펴고 지나가는 사람들 눈물 콧물 쏙 빼는 전기수도 만났다. 소녀도 한동안 그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저 멀리에서 대여섯의 조랑말이 다가온다. 홍안의 기생들이 화려한 장신구를 박은 안장 위에 앉아서 시끌벅적하게 지나갔다. 그 복잡한 길 한가운데에서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본래보다 매우 느리게 보인다. 짧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순간 소녀는 그리 멀지도 않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지금 이 여행으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처럼 기생이 되거나 혹은 누군가의 부인이 되어 규방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도, 가고 싶다고 조선을 벗어난 더 먼 여행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정해진 여인의 삶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고향에 돌아가 짐을 풀고, 상투를 벗고, 단정한 저고리를 입고, 주어진 것 외에는 한눈팔지 않고 살아야 한다. 그래도 자신만은 계속 삶을 기록할 것이라고, 그 이름이 담긴 여행기를 쓸 거라고 마음속으로 되뇐다. ![]()
그 후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기생이 되었다가, 구당 학사 김덕희의 소실이 되어 몇십 년이 흐른 뒤에 그때의 행로를 담은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탈고했다. 한양도성의 풍경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남겼던 김금원(金錦園, 1817~?)은 그렇게 실제 성 밖에서 성 안으로 가던 여행길을 글로 써냈다.
하나의 과녁에 명중하는 화살처럼 스쳐갔던 시간들
그 책이 운종가 세책점에 놓인 때로부터 또다시 수 백 년이 흘렀다. 그러나 삶이 다하는 동안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다. 그러니 그 행운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옛사람들의 매일의 고백들을 한양도성은 지금의 나에게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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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한양도성의 길을 가만히 걷고 있으면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보통의 날들을 상상하게 된다. 마치 지금 이 전의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소녀의 삶이 곧 나의 시간이었던 것처럼 하나하나 그려보게 된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오래된 시간들을 열어 볼 수 있는 것은 두 번의 삶을 사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지만, 지금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내게는 이런 꿈같은 일이 자주 일어난다. 신비한 기운이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 오래된 길
이제는 이 길 위에서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던 나를 공감하고, 앞으로 점점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걸어도 걸어도 결코 채워질 것 같지 않던 이미 지나온 시간에 대한 불신과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불안을 다독여 주는 것만 같다.
그렇게 품이 넓은 한양도성은 너그럽게 그 모든 이방인들을 다정하게 대해준다. 단지 예전에 마음을 나눴던 그때 그 사람들 같은지 그리움을 더해 나를 더 애틋하게 맞아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금세 한양도성의 오랜 친구가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나왔던 것처럼 정이 들어 체성 안과 밖을 거듭 거닐며 정답게 바라본다. ![]()
그 따뜻한 시선을 한껏 즐기는 우리의 한양도성. 앞으로도 따듯하고 다정하게 한양도성을 쓰다듬어 봐주기를, 그렇게 지금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 투영해낸 한양도성이 미래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오늘도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며 이 애틋한 꿈이 결코 바래지지 않기를 말이다.
by 김남길
"아래 소개하는 영상은
<길스토리: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프로젝트>의 시민 참여자 '김진숙'씨가 직접 촬영한 영상으로 '한양도성은 ◯◯다'를 주제로 제작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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