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글·사진 : 김은정 (패션칼럼니스트)
친구가 몇 명이냐고 물으면 물방울처럼 똑 떨어지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속마음의 바닥까지 내보이는 절친한 대상만을 친구로 정의하기에는 그 외, 다시 말해 속내까지 드러내 보이지 않는 지인들과 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뿐 나름의 친함은 존재한다. 개개인이 다르듯이 인간 관계도 각양각색이다.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진하게 친하든 미약하게 친하든 약속해서 만나는 정도라면 ‘어느 정도 친함’이라고 규정한다. 관건은 ‘어느 정도’가 움켜 잡고 있다. 내 삶 안에 자리잡은 친구라는 단어를 해부해본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친구
아무에게 쏟아낼 수 없는 종류의 얘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다. 소위 비밀로 명명되는 얘기를 털어 놓을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그 관계는 한우의 귀함에 버금간다. 이들 친구는 가족 다음으로 떠올려지는가 하면 심장 안에 VIP 좌석을 늘 차지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들 편이다. 사족을 달지 않아도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친구 중의 친구라고 보면 된다. 아침 점심 저녁 어느 때 봐도 상관이 없다. 언제 보는 것보다 만남 그 자체가 중요하다. 만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친구
느긋해지기 힘든 점심 식사보다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깃든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친구를 향한 마음이다. 저녁은 왠지 모르게 아늑한 품을 선물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다 털어놓는 친구’와 다른 점은 속내를 알리고 싶지 않은 대상일 뿐 하루의 시간대 중 황금에 비유되는 저녁 때 보는 만큼 좋은 감정을 풍부히 갖고 대하는 친구.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친구
자주 만나지 못하는 관계라도 꼭 봐야 할 얼굴이 있다. 봐야 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서일 수도, 직업적인 연관성 때문일 수도,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저녁까지 못 가더라도 점심 한 끼 먹으며 일상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친구(물론 앞서 언급한 두 카테고리에 속하는 친구를 저녁 시간에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점심 때 볼 수도 있다). 향후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차 한 잔을 나누는 친구
일반적으로 티 타임에 약속을 하는 경우 친한 사이라고 못박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허나 차 한 잔이라고 과소 평가 하면 곤란한 것 또한 사실이다. 차 한 잔에는 ‘겨를이 없어 못 만났기에 얼굴만이라도 보지 않으면 후회에 젖을’ 애잔한 감정이 실려 있다. 원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이라고 해도 지켜나가고 싶은 ‘접점’이 보이면 차 한 잔은 훈훈한 플랫폼이 되어준다. 가끔 봐도 반가운 얼굴들. 이들을 떠올릴 때 눈빛에는 생각이 어리고 입가에는 개나리가 핀다.
친구가 아닌 친구
친절함이 과하면, 말에 꼬투리를 늘 잡으면, 매사를 의심쩍게 보면,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잡지 않으면,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행동보다 말이 앞서면, 그 이름도 거룩한 친구라는 명찰을 달 자격이 없다.
어떤 이는 친구가 쓸데 없이 많은 것이 아니냐고,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곤 한다. 진심으로 대하는 이들만 친구 삼으라고. 그러기에 인생은 상당히 짧다고. 틀린 말은 아니나 어떤 시간대든 말을 섞기로 ‘선택’한 그들은 내게 양념이 다른 보양식(糧食)처럼 와 닿는다.
나의 친구 철학은 이처럼 카테고리 별로 세분화 되는 가운데 ‘관리’라는 이름 아래 크고 작은 에너지를 양산하며 삶의 순간 순간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일상을 켜는 스위치가 늘 분주 모드로 조준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정식의 푸짐함을 닮은 무지갯빛 관계는 먹지 않아도 부른 배 안의 공기처럼 정신을 팽팽하게 불린다. 형형색색의 관계가 때로는 피로함을 양산하나 복잡하고 미묘한 곡선을 그리는 에너지 분출이 싫지 않다. 교감의 향기가 진할수록 더한 행복을 느끼니 말이다.
_김은정은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와 프랑스 파리 에스모드 스타일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파리에서 일하다 패션잡지 「엘르」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패션 에디터로의 열망을 안고 한국에 돌아왔다. 패션 라이센스 잡지 엘르(ELLE KOREA), 마리 끌레르(Marie Claire KOREA)에서 패션&뷰티 디렉터, 마담 휘가로(madam figaro KOREA)에서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후 샤넬 코리아(CHANEL KOREA)에서 홍보부장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패션에 관한 글을 한국의 패션잡지에 기고하며 패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패션과의 끈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고 살고 있다. 저서로는 [Leaving Living Loving](2009), [옷 이야기](2011)가 있다. ⓒPhoto by Jin Soo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