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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 미래의 가치를 품고 있는 서울 한양도성에서
      우리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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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SAY
    Ep.06 한양도성과 함께 어울림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Ep.06

    김남길, 한양도성과
    함께 어울림

    2016년 10월 18일

    ‘어울리다’라는 말처럼 포근한 말이 또 있을까? 한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일, 이미 그 자체로 대견하고 멋스럽다.

    어느 봄날 아침 일찍 흥인지문을 나섰던 다산 정약용. 그가 살던 당대에는 분명 하나도 빠짐없이 어울리는 도성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사월 칠일 아침 일찍 흥인문을 나서며 - 도성 문을 나설 때마다 기쁨이 넘쳐 하늘과 땅이 너그러이 품어주는 듯 먼 물길이 아침 놀에 빛나니 산들은 봄날의 아름다움을 뽐내도다. (여유당전서 중)'

    사월 칠일 아침 일찍 흥인문을 나서며

    한양도성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을 지녔던 당대 사람들이 못 견디게 부러워지다 이내 약이 오른다. 도저히 직접 그 시간 안에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그만의 분위기가 탐난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을... 순성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감정이 찾아온다.

    물론 지나간 시공간을 상상하는 일, 그래서 현재에 재현해 내는 일이 불가능 한 일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 일을 해왔고, 수많은 작은 성공들은 언제나 쌓여왔다. 그러나 단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구와 인문학적 상상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여백들도 분명히 있다.

    고양이가 낮잠 뒤에 한가롭게 온몸을 늘어뜨려 기지개를 펼 때처럼, 그 유연한 몸짓으로 산맥을 기어오르는 성벽의 모습만은 도저히 복원할 수가 없다. 도저히 그 풍경은 그대로 재현될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단 한 번도 온전히 이어지는 성곽을 본 적은 없다. 전설처럼 그저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아주 옛날 옛적에는 그랬다면서...

    그때는 그랬다고...

    한양에 기꺼이 어울렸던 도성, 성벽에서 성벽을 잇던 성문, 그 천장 홍예 안에 그려진 새와 용을 감싸 안은 풀꽃과 나무들. 도성 곁 숲 풀 안에 숨어든 호랑이, 산 토끼, 까치와 까마귀. 그리고 다시 성문 문턱 아래 흙 길 위에 생긴 짚신 발자국. 그렇게 성문에서 성문으로 그대로 이어지던 서사를 온전히 누렸을 옛날 옛적 도성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성벽과 성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어지지 않는다. 신화 속 전설처럼 표석만이 남아있거나 어쩌다 성문이 남아 있대도 도로 한가운데 무인도처럼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간혹 산속 깊숙이 남은 성벽들은 온전히 성문과 함께 보존되어 있대도 이미 그때와 같은 길일 수는 없다.

    아무리 상상해봐도 실제로 보고 느낀 것만은 못하다. 본래 없었던 길이라도 만들어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성문이 자리했던 터에 세워진 표석이라도 사진으로 남기며 나름 아쉬움을 달랜다.

    아스팔트 도로에, 콘크리트 건물에 성벽이 끊기면 그만 산통이 깨진다. 이럴 때는 굳이 옛 한양도성 성곽길을 찾는 게 무슨 소용일까 회의감마저 든다. 순성을 계속하다 보면 틀림없이 언젠가는 찾아오는 왠지 억울한 이 마음.

    옛 한양도성 성곽길을 찾는 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조금만 더 그 자리에 머물러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을 삭이다 보면, 이런 감정을 먼저 더 깊게 겪은 세대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낸다. 1928년 그 해 가을, 단성사에서 가수 이애리수가 불러 크게 히트하고 전국에 퍼진 ‘황성 옛터’를 들어보라.

    당대 경성을 뒤흔든 최고의 히트곡 ‘황성 옛터’.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를 찾아 쓸쓸한 감회를 고백하는 노래. 성은 이미 허물어져 빈터다. 폐허를 찾은 나그네는 홀로 잠 못 들고, 구슬픈 벌레 소리만 듣는다. 외로운 나그네와 잃어버린 한양인 경성, 해체된 도성은 참으로 닮았다.

    어느새 성문을 아침저녁으로 여닫고, 문을 지키고 돌보고 아끼던 이들은 간데없다. 성문이 철거되기 시작한 지 그 몇 년 사이, 한양이 성곽 도시였다는 사실마저 모두 잊은 것만 같다. 그리고 이 구슬픈 노래가 발표되기 몇 달 전, 동아일보에 연재된 '구문팔자타령'에는 그 머리말부터 그야말로 버려진 고려의 옛 궁과 같은 도성의 팔자를 한탄한다.

    '옛날의 서울은 폐허로 돌아갑니다. (중략) 성이 헐리는 동시에 문루도 자연히 퇴락하여 버립니다. 다행히 동대문, 남대문이 그대로 늙어 검어진 얼굴에 허연 분칠을 하여 병신 꼴을 차리고 하염없이 앉아있을 뿐이지, 그 나머지는 벌써 어느 해에 죽어버렸는지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어 흔적 없이 왔다 갔고, 몇 개가 아직 남아 있다 한들 며칠 안에 역시 같은 운명을 밟을 모양이니......'

    지키고 돌보고 아끼던 이들은 간데없다

    당시 도읍을 둘러싼 자연스러운 연결은 끊어져 버렸다. 겉으로 도시계획 때문에 도성 문을 해체하는 거라는 명분을 세웠지만, 1899년 돈의문-청량리 간에 최초로 전차를 개통했을 때에도 성문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때는 궤도를 성문 안으로 지나게 함으로써 성벽 파괴를 피했다.

    1902년에는 숭례문과 돈의문의 단청을 새로 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설치된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도성은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아니 뭐 그래서, 사람 사는 일이 다 똑같지. 도시를 근대적으로 재정비한다는데 무슨 큰일이 날까라며 시대가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자동차가 처음 조선의 거리에 나타났을 때, 그 소리 나는 괴물에 놀라 기절한 사람들 천지였던 시기도 가고, 다들 그 자동차를 현대 문물의 상징으로 여기며 타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1924년, 당대에도 한양도성은 이미 빛바랜 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그렇게 자연스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도 당대의 사람들은 비교적 근래까지 한양도성의 본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겠지. 그러니 일상에 치여 항시 돌아보지는 못한다 해도 그 마음은 애달팠을 것이다.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연결되던 성벽이 당연하게 끝나버렸으니, 어린 시절 성곽을 따라 한양도성의 풍경을 굽어봤던 기억이라도 떠오르게 되면 더욱 허전했을 것이다. 이미 사라진 성벽을 상상해서 다시 지어내도 끝내 상상력의 한계로 그려내지 못한 섭섭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양도성의 풍경을 굽어봤던 기억

    그렇게 살면서 문득문득 언젠가 연락이 끊긴 옛 친구, 더 거슬러 올라가 소학교 시절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난기 가득한 동무의 얼굴을 그리는 것처럼 한양도성을 그리워했겠다.

    그래, 그렇게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놔두자.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데로 놓아주자. 모두 가질 수 없대도, 결코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으니까.

    한양도성이 지녔던 그 수많은 어울림. 그것만으로도 이미 과거와 미래 사이,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by 김남길
    "아래 소개하는 영상은
    <길스토리: 서울 한양도성 10人10色 프로젝트>의
    시민 참여자 '박영주'씨가 직접 촬영한 영상으로
    '어울림'을 주제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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