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체적인 말의 힘 >
글 : 손화신 (작가)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맑은소리
소금 같은 메밀밭이 마음 안에 하얗게 퍼지는 대목이다. 소설이 우리 마음에 이런 풍경을 꾸려놓을 수 있는 건 구체적인 묘사 덕분이다. 산허리쯤 걸린 길, 밤중, 고요함, 달빛,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 하얀 메밀꽃들. 밤중에 본 메밀밭의 풍경을 이토록 섬세한 감성으로, 구체적이면서도 시적으로 표현해내는 건 놀라운 일이다. 좋은 소설의 힘은 역시나 감성과 표현의 구체성에 있단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말도 글처럼 구체적일 때 힘을 갖는다. 구체적인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이끌어낸다. 길에서 사고를 당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들었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향해 도와달라고 말하는 대신 '파란색 옷 입은 여성분, 119에 신고 좀 해주세요'라고 콕 집어 부탁해야 한다고.
집에서도 구체적인 말의 필요성은 존재한다. 게임에 빠진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 이왕이면 엄마는 구체적으로 잔소리를 해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것이다. 몇 시까지 게임을 끝내야 한다고 시간을 못 박지 않는다면 아들이 공부하는 모습은 턱도 없다.
학교에서의 의사소통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한다. 청소시간마저 그렇다. 철수는 쓸고, 영희는 닦고, 광태는 칠판지우개를 털라고 구체적으로 지정해 시키지 않으면 선생님 혼자 청소를 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말의 힘이 가장 좋게 발휘되는 건 바로 '칭찬'이다. 가끔 이런 기분 들 때가 있다. 방금 내가 들은 게 분명 칭찬이긴 칭찬인데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 이 찝찝함의 원인은 '영혼 없는 칭찬'에 있다. 영혼이 부재중인 칭찬은 대부분 짤막하고 추상적인 모습이다. 당신이 만약 화가인데, 친구에게 힘들게 완성한 작품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면, 꼭 칭찬은 아니더라도 친구의 진심 어린 관심을 기대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눈을 반짝이며 친구의 입술을 초조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친구가 '응, 잘 그렸네'하고 그걸로 끝이라면? 이런 순간에 밀려오는 건 오직 본전 생각이다. '아, 괜히 보여줬다!'
그림이 좋았다면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줘야 한다. "색채 표현이 굉장히 독특한데? 강렬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이야. 독창적인 그림이군." 이 정도도 아니하고 자신의 칭찬이 값어치를 얻길 바라서는 안 된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칭찬하라는 말은 길게 칭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간결하게 말하더라도 표현에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진심도 전달되니까.
- 이 글은 <나를 지키는 말 88>(쌤앤파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_손화신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다. 스피치 모임을 10년 동안 진행해오며, 진정한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말의 뿌리인 침묵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키워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현직 음악담당 기자이며, 길스토리 프로보노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브런치 주소: brunch.co.kr/@ihear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