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표 떼기
글 : 손화신 (작가)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은 타인이 나에게 하는 말보다 중요하다. 내가 나에게 하는 부정적인 말, 스스로에게 꼬리표를 다는 말은 좋지 않다.
미국의 심리학자 웨인 다이어는 자신의 저서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꼬리표 붙이는 일을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나는 노래를 못해” 하고 스스로에게 선언하게 되면 앞으로 노래실력이 늘 가능성마저 제 손으로 꺾어버리는 셈이다. “나는 달리기를 못해”하고 꼬리표를 붙이는 순간 그 꼬리표가 어딜 가나 자신의 다리를 무겁게 만든다.
언어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언어가 감옥이 되어 우리를 속박할 수도 있고, 날개가 되어 우리를 날게 할 수도 있다. 선택권은 언제나 내 손 안에 있다.
인도의 철학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자신이 말의 노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다(어떠하다)’라는 말이 우리를 조건 짓고 있습니다. 우리를 옥죄는 조건들은 모두 ‘나는 무엇이었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무엇일 것이다’라는 말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나는 무엇이었다’가 ‘나는 무엇이다’를 결정하고 이것이 다시 미래를 통제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희망탐색> 중)
웨인 다이어와 크리슈나무르티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같다. 말로써 한계를 긋는 것도, 그 한계 앞에서 좌절하는 것도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언어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내면의 언어를 긍정적인 언어로 바꿔야 한다. 아니, 긍정적인 언어까지 아니더라도 적어도 꼬리표는 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사슬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모든 판단의 말들을 멈춰야 한다.
만약 내가 오늘 노래를 하다가 박자와 음정이 다 틀렸다면 ‘나는 오늘 노래를 부를 때 박자와 음정이 틀렸다’라고만 말하면 될 일이다. 구태여 ‘나는 음치다’라고 꼬리표를 만들어 붙일 필요가 없다. 무심코 붙이는 꼬리표에 좌지우지 되고 노예 되는 건 결국 자신이다.
말이란 건 나의 의지로 나의 입술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되레 내가 만든 그 말이 나를 만들어가고 나의 운명을 앞에서 끌어당긴다. 그래서 우리는 긴장되거나 자신이 없을 때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함으로써 그 언어가 나의 손을 붙잡고 위로 끌어올려주길 바란다.
정장을 입으면 몸가짐이 차분해지고, 구두를 신으면 걸음걸이가 우아해진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말은 그 말에 어울리는 내 모습을 불러온다. 당신 자신에게 오늘,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말은 당신을 어떤 곳으로 데려갈까.
- 이 글은 <나를 지키는 말 88>(쌤앤파커스)에 실린 글입니다.
_손화신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다. 스피치 모임을 10년 동안 진행해오며, 진정한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말의 뿌리인 침묵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키워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현직 음악담당 기자이며, 길스토리 프로보노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브런치 주소: brunch.co.kr/@ihear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