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빠르게
글 : 손화신 (작가)
“사과는 빠르게, 키스는 천천히, 사랑은 진실하게, 웃음은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너를 웃게 만든 것에 대해서 절대 후회하지 말 것.” - 오드리 헵번
빠르게 사과하는 사람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일전에 한 건물 안에서 코너를 돌다 중년여성과 살짝 부딪힐 뻔했다. 그때 그분이 내게 아주 재빠르게 사과했다. 손쓸 수 없이 재빨랐다. “미안합니다.” 정갈하고 겸손한 다섯 글자가 내 귓속으로 콕 박혀왔다. 너무 순간적이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그때 그분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녀와 난 부딪히지 않았고 단지 부딪힐 뻔한 것인데, 비일비재한 그런 상황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 적이 있었던가? 걷다 보면 그런 일은 자연현상과도 같았고, 사과는 과한 것이라 여겨왔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던 한참 손윗사람의 그 여성에게서 무척 좋은 향이 났기 때문에 나도 재빠르게 사과하는 사람이 되리라 그 순간 다짐했다. 그럼 내게도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아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이였던 당시의 내게는 굉장히 분한 일이었는데, 사실 지금도 조금 분하다. 마트였고 계산대의 줄이 길었다. 나는 물건을 계산하려고 줄을 서 있었는데 앞에 선 아주머니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내 발을 세게 밟았다. 내가 “아야!” 하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휙-하고 몸을 돌리는 동작과 함께 그녀의 입술은 ‘죄송합니다’의 첫 글자를 말하기 위해 오므려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입술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그 말을 끝내 듣지는 못했다. 뒤를 돌아본 아주머니의 고개가 작은 내 키를 따라 쭉 내려오더니, 자신이 발을 밟은 상대가 어른이 아니란 걸 알고는 휙-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성가시다는 표정만을 남겨놓고서. 나는 그때 딱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크면 저런 어른은 안 될 거야!’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는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나는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도, 신문이나 TV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간적인 그 모습을 갈구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혹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이유로 진실을 함구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나 역시도 비겁하게 그랬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버젓이 그 자리에 존재하기에, 우리가 함구하거나 우긴다고 해서 진실의 귀퉁이 하나 바꿀 수 없단 걸 우리의 양심은 이미 알고 있다. 거짓은 언제나 진실을 재빠르게 인정하지 않는 느린 틈새에서 싹을 틔운다.
우리가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기 위해선 늘 겸손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겸손이란 망루 위에서 철저히 거짓을 감시하고 그것이 우리 삶을 침략하지 않게 지켜준다. 연암 박지원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이야기를 예로 들며 이러한 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장님이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나서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고 자신 있게 설명하지만 그건 코끼리의 다리일 뿐이지 전체의 모습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틀렸을 수 있단 여지를 남겨놓는 태도. 그런 겸손한 태도야말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남겨둔 여지로부터 발견해낸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재빠르게 사과하는 용기. 향기가 났던 그 여성처럼 서로가 똑같이 틀렸을 때조차 머뭇거림 없이 먼저 사과하는 용기. 그런 용기 있는 모습이 우리가 꿈꾸던 인간성의 얼굴이 아니었던가.
_손화신은 에세이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다. 스피치 모임을 10년 동안 진행해오며, 진정한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말의 뿌리인 침묵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키워나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현직 음악담당 기자이며, 길스토리 프로보노이자 카카오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글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 브런치 주소: brunch.co.kr/@ihear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