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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세상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Hwashin Son
    Writer
    손화신 / 상세보기
    선배 말고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추천수 204
    조회수   1,493
    선배 말고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글 : 손화신 (작가)

    어른이 되면서 개인을 개인으로 보는 법을 잊어간다.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할 때 상대의 이름만으로 저장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이름 앞에는 그가 속한 회사명을 적고 이름 뒤에는 그가 그곳에서 맡고 있는 직책을 적는다. 안어른 컴퍼니 손화신 대리. 이렇게 길고 꽉 차게 적어야 안심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이름만 적어서는 그 사람을 기억할 자신이 없다. 일로 만난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지만, 한 사람을 그의 이름 석 자 고유명사로써 대하는 게 아니라 역할의 이름으로써 대한다는 게 씁쓸하다. 내가 관계 맺고 대화하는 내 앞의 이 존재는 회사인가, 사람인가.
    일을 하면서 가끔 관계자 미팅을 할 때가 있다. 안어른 컴퍼니의 언론홍보팀 직원을 만나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일단은 개인적인 소재로 대화의 문을 연다. 이 음식이 입에 잘 맞으신지, 댁은 어느 쪽이신지, 출퇴근하기 멀진 않으신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지만 아주 가끔은 개인적인 대화만 하다가 끝나는 미팅도 있다. 물론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그럴 때 그 직원이 안어른 컴퍼니의 대리인이 아니라 이름 석 자를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왠지 기분 좋은 만남은 늘 이런 식이었다. 만날 땐 비즈니스로 만났지만 이야기하면서 서서히 인간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실제로 대리님-기자님 하던 사이에서 언니-동생 하게 된 경우도 있다.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갈 사람을 얻은 것이다.
    예전에 한 여배우를 인터뷰했을 때 그가 한 말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저는 지금 이 순간도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영화 홍보 차 마련된 인터뷰긴 하지만 어찌됐건 이 순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잖아요. 비즈니스처럼 딱딱하게 이야기한다면 그건 너무 삭막한 것 같아요."
    벌써 꽤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 후회로 남아있는 일 하나가 있다. 기자일을 막 시작했을 때 나보다 3개월쯤 먼저 입사한 선배가 있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4살쯤 어렸다. 그 선배가 집에 가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내게 "나이도 제가 어리고 연차도 별로 차이가 안 나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 달라,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 달라, 나도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제안했는데, 글쎄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아는가.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바보 같은!
    갓 입사한 나는 필요 이상으로 군기가 잡혀있었다. 그때 내 눈에 그 사람은 오직 선배였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사람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었고 그 사람이 좋았다는 점이다. 결말은 말 안 해도 아시리라. 우린 친해지지 못했다. 내가 그를 역할로만 보는 바람에.
    사람을 잃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 손화신 작가의 에세이 <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에 실린 글입니다.

    _2016년 8월부터 길스토리 크리에이터 멤버로 활동 중이다. 6년째 문화예술 전문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나를 지키는 말 88>의 저자이기도 하다. 2019년 9월 1일,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대상에 빛나는 두 번째 책 <아이라는 근사한 태도로>(웨일북)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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